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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박: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

필자 (匹子) 2020. 11. 27. 19:52

1979년에 간행된 미하엘 엔데 (Michael Ende, 1929 - 1995)의 『끝없는 이야기 Die unvollendete Geschichte』는 괴테 Goethe의 『파우스트』, B. 슐링크의 『책읽어주는 남자』와 함께 독일에서 가장 즐겨 읽히는 청년소설입니다. 미하엘 엔데의 소설은 일본에 많이 소개되었으나 (미하엘 엔데의 두 번째 부인이 일본여인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엔데는 초현실주의 화가로 활동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예술적 상상력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60년대부터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를테면 1973년에 발표된 『모모 Momo』는 작가에게 독일 청년문학상을 안겨주었지요. 일단 작품의 줄거리를 살펴보겠습니다.

 

 

 

 

 

 

소설 끝없는 이야기

 

 작품의 주인공은 바스티안 발타자르 벅스라는 이름을 지닌 11살의 내성적인 아이입니다. 아버지는 오래 전부터 아내의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자식의 교육을 등한시합니다. 바스티안은 작고, 뚱뚱하며, 영리하지도 못합니다. 학교 친구들로부터 따돌림 당합니다. 바스티안은 특히 체육시간을 제일 싫어합니다. 그렇지만 그에게도 한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놀라울 정도로 탁월한 상상력입니다. 어느 날 바스티안은 카를 콘라드 코레안더라고 하는 헌책방 주인을 알게 됩니다.

 

카를은 “끝없는 이야기”라는 비밀스러운 소설을 탐독하고 있었습니다. 바스티안은 이 책이야말로 책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책이리라고 지레짐작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은밀하게 어떤 “끝없는 이야기”를 갈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인종이 울리자, 카를은 책을 덮고 밖으로 나갑니다. 바스티안은 바로 그 책을 훔쳐서, 학교의 다락방으로 올라갑니다. 바로 그곳에서 주인공은 “끝없는 이야기”를 탐독하기 시작합니다.

 

 책은 판타지아라는 나라를 묘사합니다. 판타지아는 말 그대로 환상의 제국이지요. 이곳을 다스리는 자는 천진난만한 여왕입니다. 그미는 중병에 걸려서 죽을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여왕의 병이 더욱 심각해질수록, 판타지아 역시 점점 더 커다란 위험에 빠집니다. 천진난만한 여왕은 신통력을 지니고 있지만, 스스로 이를 사용하지 못합니다. 그미는 “아트레주”에게 한 가지를 부탁합니다. “아트레주”는 -마치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영웅들처럼- 주인공과 비슷한 나이를 지닌 “초록 민족”의 소년입니다. 주인공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용기, 용맹심 그리고 결단력까지 겸비하고 있습니다.

 

그의 임무는 여왕의 병을 고치고 자신의 나라를 구원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아트레주”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정보들을 수집합니다. 그는 서서히 스스로의 힘으로는 여왕과 판타지아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방도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누군가가 천진난만한 여왕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여왕은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천진난만한 여왕은 언제나 어떤 새로운 이름을 얻어야 자신의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숙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그미는 결국 유명을 달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스티안은 소설을 읽어나가다가, 자신이 서서히 판타지아로 향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처음에는 주인공이 이를 의식하려고 하지 않지만, 이야기의 진행 과정에 영향을 끼치려고 합니다. 바스티안은 “아트레주”에게 짤막한 신호를 보냅니다. “아트레주”는 주인공의 신호를 알아차리고 일순간 커다란 희망에 사로잡힙니다. “아트레주”는 주인공이 시키는 대로 행동합니다. 바스티안은 자신이 판타지아를 구원할 수 있는 소년이라는 것을 깨닫지만, 어떤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어쩌면 여왕이 자신을 모습을 대하게 되면 천박하다고 여길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 이름을 큰 소리로 외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여왕은 거의 파괴 직전에 이른 나라를 구원하기 위해서 어떤 꾀를 사용합니다. 그러자 바스티안은 그미에게 “몬덴킨트 Mondenkind”라는 이름을 전합니다.

 

 바스티안은 직접 판타지아의 나라로 떠납니다. 천진난만한 여왕은 주인공이 원한다면 자신의 뜻대로 세계를 새롭게 변화시켜보라고 부탁합니다. 주인공은 이러한 부탁에 응하면서 여왕의 장신구인 아우린 Auryn을 건네받습니다. 장신구만 있으면, 얼마든지 새로운 세계를 멋지게 꾸밀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예전과는 전혀 다른 판타지아의 세계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급기야 바스티안은 장신구를 가지고, 자신의 성격상의 결함을 고치려고 시도합니다. 그는 스스로 강하고, 용기 있고, 영리하기를 몹시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의 갈망은 결코 실현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스티안이 판타지아의 세계를 개조할 때마다, 자신의 기억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스티안은 그제야 비로소 깨닫습니다, 즉 갈망이란 자신의 진정한 의지가 무엇인지를 깨닫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결국 주인공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결국에 그는 “아트레주”의 도움으로 아버지가 살고 있는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게 됩니다.

 

 바스티안도 그러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갈망하는 세계에 빠져서 주어진 실제 현실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오로지 갈망만을 탐닉하다가, 결국 의사소통의 부재, 무의미, 고립 등을 뼈저리게 체험합니다. 우연히 바스티안은 “이스칼나리 Yskalnari”라고 하는 공동체를 알게 됩니다. 그곳의 사람들은 함께 의지하며 공동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주인공은 자신의 자아가 자신의 다른 자아와 구분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예컨대 바스티안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의 과거를 깊이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주인공은 한 번도 어머니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습니다.. 바스티안은 “아이우올라”라고 하는 부인에게서 모성애를 느낍니다. 그는 자신의 꿈을 추적하기 위해서 요르스 탄광 속에서 헤매다가 불현듯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탄광 속에서 바스티안은 아버지의 몸을 감싸고 있는 딱딱한 얼음덩어리를 깨뜨립니다. 판타지 속에서의 이러한 체험을 통해서 소통의 능력과 새로운 현실 감각을 발견하게 됩니다.

 

 

 

미하엘 엔데

 

 엔데의 소설은 형식적으로도 어떤 특이한 점을 지닙니다. 글자는 붉은 색과 초록색으로 인쇄되어 있습니다. 초록색 글자로 구분된 장은 도합 26장인데, 이는 알파벳, 다시 말해서 A부터 Z까지 나누어져 있지요. 언어의 의미는 현실을 창조하는 속에서 나타납니다. 바스티안은 가상의 세계에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그 세계를 새롭게 창조합니다. 이야기는 말 그대로 알파벳으로부터 만들어지지요. 작가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도대체 현실이란 무엇인가? 가상적 세계는 정말로 어떠한가? 바스티안은 책을 읽으면서 가상적 세계로 빠져듭니다. 이는 오로지 자신의 고유한 상상과 갈망, 다시 말해서 내적인 상념을 확장시킴으로써 가능하게 되지요. 작품의 핵심적인 테마는 가상적 세계와 현실적 세계에 판타지가 끼치는 영향입니다.

 

물론 판타지는 때로는 취약점을 지니기도 합니다. 즉 현실과 가상 사이의 분명한 구분이 없을 경우, 판타지와 주어진 현실 사이의 경계가 흐릿해질 경우, 사람들은 두 개의 현실 사이에서 분열을 일으킵니다. 가령 “정신분열증 Schizophrenie”을 생각해 보세요. 그렇지만 가상적 세계는 판타지를 통해서 생겨나게 되지요. 또한 판타지 없는 현실적 세계는 무미건조할 뿐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병든 세계일지 몰라요. 판타지는 엔데에 의하면 현실의 세계를 무척 풍요롭게 해준다고 합니다.

 

실제로 미하엘 엔데는 어느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외부적으로는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지만, 내면적으로는 가련한 악마들과 같아요.” 왜냐하면 독일 사람들은 경제적 풍요로움을 누리고 살아가지만, 내적으로는 꿈을 잃은 채 황량하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미하엘 엔데는 인간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천진난만한 꿈과 환상을 문학적으로 훌륭하게 형상화해주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화가 마르크 샤갈 Marc Chagall의 몽환적 유년에 관한 추억과 동일합니다. 그저 문학 작품으로 형상화되었다는 게 다를 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