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독일시

한스 울리히 트라이헬의 '자화상, 수정된'

필자 (匹子) 2023. 8. 20. 06:55

자화상, 수정된

한스 울리히 트라이헬

 

 

마지막 남은 머리카락 없어지렴.

인간은 해골과 뇌라고 하니까.

진단: 세월과 함께 수축된다.

하늘 속에는 달, 나의 천체.

 

전망은 항상 동일한 것이다.

풍경: 아마도 나무들이 있으리라.

인간: 처음엔 젖먹이, 다음엔 시체.

별들은 영원하다. 그걸로 충분하리라.

 

창백한 피부색으로 구성된 어느 허상.

이전에 아주 미끄럽게 수행되었다.

어느 분화구, 균열, 어느 흉터:

그것은 자화상이야, 수정된.

 

(Selbstporträt, korrigiert von Hans-Ulrich Treichel: Weg mit den letzten paar Haaren./ Der Mensch sei Schädel und Hirn./ Diagnose: geschrumpft mit den Jahren./ Im Himmel der Mond, mein Gestirn.// Der Ausblick ist immer der gleiche./ Die Landschaft: Bäume vielleicht./ Der Mensch: erst Säugling dann Leiche./ Die Sterne sind ewig. Das reicht.// Ein Trugbild aus hautbleicher Farbe./ Vor Zeiten zu glatt ausgeführt./ Ein Kratzer, ein Riß, eine Narbe:/ Selbstporträt, korrigiert.)

 

(해설)

현재 우리는 어떠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시대정신은 방금 동면 (冬眠)에 들어간 곰의 상태를 연상시킵니다. 그래, 우리는 목적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몇몇 사회적 이슈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는 방향 감각을 상실한 것 같습니다. 기존 사회주의의 몰락은 현대인들에게 거대한 실망 대신에 도저히 측정할 수 없는 지루함을 안겨 주었습니다. 몇몇 국지전을 제외하면, 세계대전은 발발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과거의 굶주림과 가난, 기아와 질병 등은 퇴치된 것처럼 보입니다. 생태계 파괴에 대해 어느 지식인이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해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오늘날의 삶은 마치 일요일에 즐기는 자전거 경주처럼 느껴질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트라이헬의 시는 침묵할 듯 말듯 몇몇 단어로써 바로 이러한 세상의 지루함, 목적 상실의 삶 속에서 그냥 흐르는 시간을 붙잡으려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쳐다보니, 시적 자아는 자신의 머리카락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음을 인지합니다. 어느새 세월이 그렇게 빨리 흐르고 말았습니다. 과거의 사람들은 시간을 화살에 비유했습니다. 그것도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빠른 화살 말입니다. 어쩌면 인간의 삶은 화살이 죽음이라는 과녁으로 날아가는 과정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일촌광음이지요. “모든 것이 헛되구나.” 구약성서의「전도서」에 기술된 것처럼 인간의 삶은 이렇듯 허망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래, 시간처럼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모래시계는 우리를 전율케 합니다. 그렇지만 시간의 흐름을 서술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를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애의 감정을 안겨줍니다.

 

마지막 남은 머리카락 없어지렴.” 인용 시구는 독일의 시인, 발터 폰 데어 포겔바이데 (Walter von der Vogelweide)의 다음과 같은 시구를 연상시킵니다. “오 슬프다, 나의 모든 세월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Owê war sint verswunden alliu miniu jar.)” 그렇지만 시적 자아는 감정적으로 덧없는 세월의 흐름을 탄식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호라티우스처럼 향락주의적 관점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호라티우스는 “오늘을 즐겨라, 그리고 가급적이면 내일을 생각하지 말라. (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하고 노래하지 않았습니까?

 

시적 자아는 아무런 종교적 관점도 드러내지 않으며, 감상적으로 비애를 노래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그저 시큰둥하게 “마지막 남은 머리카락 없어지렴.”하고 기술할 뿐입니다. 마지막 남은 머리카락에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흔히 “인간의 탁월성은 외모가 아니라, 해골 속의 “”에서 발견된다.”고 하지만, 시적 자아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논평을 회피합니다. 그는 그저 인간의 몸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수축”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시적 자아는 인간의 모든 행위를 다음과 같이 규정합니다. 즉 그것은 자신의 갈망에 해당하는 “허상”을 실천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아주 미끄럽게 수행”했다는 표현으로 미루어, 시적 자아는 대부분의 계획들을 아무 장애물 없이 성취한 것 같습니다. 그의 얼굴은 이제 늙음을 보여줍니다. “어느 분화구, 균열, 어느 흉터” - 그의 피부는 우주 속의 수많은 천체들의 표면처럼 변모하고 말았습니다.

 

인용 시는 우리에게 과연 무엇을 전하고 있을까요? 시간이 지나면 인간은 사멸합니다. 그렇지만 나무들은 계속 서 있을 것이고, 하늘 위의 달 그리고 별들은 영원히 존재할 것입니다. 핵심적 문제는 시인의 “그걸로 충분하리라.”는 표현 속에 담겨 있습니다. 아마도 독자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노여워할 것입니다. 아니, 그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격분할지 모릅니다. 어째서 그것으로 충분하단 말입니까? 인간의 열망이 어찌 허상으로 표현될 수 있을까요? 인간은 우주의 꽃이 아니란 말입니까? 개별적 인간은 결국 죽는 존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종으로서의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늙고, 허망하고 무심하게 사멸해야 한단 말입니까? 어쩌면 시인은 독자의 분노를 처음부터 역으로 의도했는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