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독일시

서로박: 뫼리케의 '오르플리트 나의 땅'

필자 (匹子) 2023. 9. 24. 05:58

 

 

에두아르트 뫼리케 (1804 - 1875)의 초상화 

 

 

 

친애하는 J,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고향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특히 시인에게 고향은 시적인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계기로 작용합니다. 왜냐하면 고향은 유년의 시기에 보냈던 정겨운 공간으로 기억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고향은 대체로 시인이 고유하게 체험했던 과거의 공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독일의 목사, 시인으로 살았던 에두아르트 뫼리케 Eduart Mörike (1804 - 1875)에게 고향은 자신이 실제로 살았던 유년의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고향은 지상에서 발견될 수 없는 곳이었으며, 그의 젊은 친구들 (루드비히 바우어, 빌헬름 바이블링거)과 함께 가상적으로 상상해낸 이상의 장소였습니다. 뫼리케는 그 장소를 “오르플리트 Orplid”라고 명명했습니다. 이를테면 낭만주의 시인인 브렌타노가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자신의 이상향을 바두츠 Vaduz라고 설정했다면, 뫼리케는 그곳을 오르플리트 Orplid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대는 오르플리트, 멀리서

빛을 발하는 나의 땅!

그대의 양지바른 해변은 바다 위로

안개를 피워 신의 뺨을 적시는구나.

 

태곳적의 물결들, 그대의 허리 주위에

솟구쳐 젊음을 발산하는구나, 아이야!

신과 같은 그대의 모습 앞에서 그대의

관리인, 왕들이 고개 숙이는구나.

 

Du bist Orplid, mein Land!/ Das ferne leuchtet,/ Vom Meere dampft

dein besonnter Strand/ Den Neben, so der Götter Wange feuchtet.

Uralte Wasser steigen/ Verjüngt um deine Hüften, Kind!/ Vor deiner

Gottheit beugen/ sich Könige, die deine Wärter sind.

 

 아직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처녀지 - 오르플리트는 하나의 가상적인 장소이지만, 시인 외에는 아직 누구도 발견해내지 못한 아름다운 처녀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곳은 마치 이암불로스 Iambulos가 고대에 상정해낸 남쪽나라의 따뜻하고도 찬란한 공간, 「태양 섬」과 같은 곳입니다. 억압과 강제 노동이 없는 곳, 추위와 가난에 대한 걱정도 없고, 힘든 노동도 행하지 않은 채 춤추며 안락하게 살아갈 수 있는 천혜의 낙원이 바로 태양 섬이지요.

 

 

 

 

 

 클레버줄츠바흐라는 마을에 있는 뫼리케의 목사관

 

 

그렇다면 뫼리케는 어떠한 내적 심리 상태에서 오르플리트를 갈구하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세 가지 측면에서 그 원인을 유추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뫼리케는 어머니의 존재를 오랫동안 부담스러워했습니다. 군의관이었던 아버지는 12 자식을 남겨두고 (에두아르트는 일곱 번째 자식이었습니다),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뫼리케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아들도 목사가 되기를 애타게 바랐습니다. 그러나 뫼리케는 신학교에서 그저 평범한 학생이었고, 성적 역시 탁월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그는 심리적으로 유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신학보다는 문학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였지만, 성격상으로 -마치 프리드리히 횔덜린이 과감하게 전업 작가로 선언할 만큼의- 과단성을 지니지도 못했습니다.

 

1834년 드디어 그가 어느 작은 마을의 목사가 되었을 때, 어머니는 막내딸 클라라와 함께 목사관으로 이주해서 시인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 클레버줄츠바흐 Cleversulzbach라는 마을에는 프리드리히 실러의 묘비가 있었습니다. 실러의 명성은 당시에는 미미했으므로, 아무도 그의 묘비를 눈여겨보지 않았습니다. (원래 작가의 명성은 수십 년이 흘러야 나타나곤 합니다. 가령 조선일보가 판을 치는 사회에서 사회주의의 지조를 지닌 작가는 언제나 외면의 대상이 되듯이, 소공국 체제 속에서 실러의 「도둑떼들」이라는 극작품은 외면당하기 십상이지요.) 뫼리케는 그의 묘비를 정성스럽게 가꾸었습니다. 마치 그곳에 무명시인인 자신이 묻혀 있다고 “착각”하면서 말입니다. 1841년 어머니가 죽었을 때, 뫼리케는 실러의 묘비 옆에 어머니의 시신을 묻었습니다. 그리고는 어머니의 묘비에다 “실러의 어머니라고 새겨 넣었습니다.

 

(2.) 뫼리케는 프로테스탄트의 신앙에 대해 맹목적으로 열광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죽은 자를 위해 기도를 올리곤 하지만,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목사라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서 그다지 신명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가령 다비드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 David Friedrich Strauss는 『예수의 삶』이라는 책을 간행했는데, 루터 교회의 목사들은 이 책을 교리에 어긋난다고 싸잡아서 비난했습니다. 이때 시인은 동료 목사들의 극단적인 태도를 혐오하며, 오히려 슈트라우스를 동조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뫼리케는 교회의 권력과 권위를 은근히 비아냥거렸습니다. 진정한 권력은 세속적인 힘과는 다르다는 게 뫼리케의 판단이었습니다.

 

위대한 분은 뫼리케의 견해에 의하면 교황이 아닙니다. 오히려 숨어서 살아가는 어떤 수도사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혁명적 사상은 슈바벤 경건주의 내지 독일 신비주의 사상과 같은 맥락을 지니고 있지요. 가령 인용 시에서도 나타나고 있지만, 왕들은 신의 "관리인 Waerter"들로서 이 세상에서 조그만 권력을 지니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뫼리케는 유령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유령이 자신의 주위에 맴돌고 있다고 믿는 등 아침저녁으로 우울해하는 등 정신 착란의 증세를 보였습니다.

 

 

 (3.) 뫼리케는 19세 되던 해에 두 살 나이 많은 처녀를 알게 되었고, 그미를 뜨거운 마음으로 사랑하였습니다. 마리아 마이어 Maria Mayer라는 비교적 천하다고 하는 계급의 여성이 그미였지요. 갈피를 잡지 못하는 젊은이를 대하던 어머니와 누나는 그로 하여금 “더러운 여자와의 불결한 관계”를 청산하도록 유도하였습니다. 결국 시인은 그미와의 사랑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에 대한 순수하고도 육감적인 사랑은 그의 문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밖에 시인은 자신의 막내 여동생에 대해 몹시 애호하였습니다. 사춘기가 지나면서 그의 호감은 욕정이 뒤엉킨 사랑으로 돌변하였으며, 시인 자신도 이를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뫼리케의 문헌들 (남긴 편지 그리고 연구서들)은 이에 관한 분명한 사항을 전해주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뫼리케의 연정이 이른바 근친상간의 혐의로 실현될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뫼리케의 사랑의 삶은 이렇듯 처절함의 연속이었습니다. 형제들의 빚을 대신 갚느라고 시인은 1851년에 이르러서야 뒤늦게 결혼해야 했지요. 그가 세 들어 살던 집의 주인 딸을 아내로 맞이한 것은 오로지 돈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돈 때문에 주인집 딸과 결혼하다니... 그렇다면 장차 신랑의 결혼 생활은 언제나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 그리고 스프 식사로 이어지지 않겠습니까? 뫼리케가 사랑의 삶에서 불행을 겪었던 까닭은 자신에게 주어진 부자유의 삶 그리고 슈바벤의 폐쇄적인 환경에 기인합니다.

 

 당신이 뫼리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억압과 폭력이 비일비재하던 슈바벤 지방의 풍토, 슈바벤 경건주의자들과 신비주의자들이 교회에 가지 않고, 집에서 촛불을 켜두면서 기도하는 분위기 그리고 혁명의 실패로 인하여 슈바르트 (Schubart)와 같은 수많은 젊은 지식인들이 감옥에 갇히거나 고문 당하던 참혹한 시대를 우선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슈바르트는 슈베르트의 현악오중주 "숭어"의 작사를 담당했던 시인이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고,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그렇다면 친애하는 J, 당신이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어떠한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