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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박: 릴케의 말테의 수기 (1)

필자 (匹子) 2019. 6. 7. 19:27

1. 시인 릴케의 유일한 산문 작품: 친애하는 J, 『말테의 수기』는 장미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1875 – 1926)가 남긴 유일한 산문작품입니다. 1904년 로마에서 릴케는 일기 형식으로 모든 것을 기록하였고, 1908년에서 1910년 사이에 다시금 파리에서 완성하였습니다. 작품은 모두 71편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일정한 줄거리로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일기 형식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그리고 서술에 있어서 몽타주 기법이 동원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이야기는 산만하고 난삽합니다.

 

그렇기에 작품은 어떤 의도적 단편적 미완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말테의 수기』는 19세기의 리얼리즘 소설과는 급진적인 차이를 지닙니다. 일관된 스토리도 없고, ‘소설적 화자’ 역시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놀라운 것은 작품 속에 가상적 편집자가 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가상적 편집자는 주인공 말테가 직접 서술하기 어려운 주변의 정황을 객관적으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릴케 역시 자신의 작품을 “장편”이 아니라, “산문서적”으로 명명하였습니다.

 

2. 의식의 흐름이라는 기법 (1): 릴케의 소설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냄새 하나만으로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 대작, 마르셀 프루스트 Marcel Proust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를 생각해 보십시오, 80행이 넘는 문장으로 끓어오르는 의식의 약탕 즙을 세밀하게 묘사한 제임스 조이스 James Joyce의 『율리시즈』 만큼이나 복합적이자 실험적입니다. 말테의 내면적 서술은 신비로운 부정의 문학을 창조한 프란츠 카프카 Franz Kafka 그리고 자아라는 내적 존재를 집요하게 추구해나간 오스트리아의 소설가 로베르트 무질 Robert Musil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20세기 초에 등장한 일련의 소설가들은 대체로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설명됩니다. 첫째로 20세기 초반의 작품들은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의사소통이 단절된 자아의 삶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은 거대한 익명의 파도 속에서 소외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둘째로 이들은 사회적으로 철저히 고립되고 망각된 채 살아가기 때문에 자의식에 침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전체주의의 이데올로기에 이리저리 이용당하지 않으려고 개인적으로 처절하게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3. 의식의 흐름이라는 기법 (2): 그밖에 의식의 흐름의 기법에 커다란 역할을 담당한 것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관한 관찰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의식의 흐름의 수법으로 창조된 장편 소설들이 당국에 의해서 체제 파괴적으로 비판당했다는 사실입니다. 전체주의의 이데올로기를 활용하는 국가의 눈에는 개인의 내면세계 내지 무의식에 관한 관심이 체제 파괴적으로 매도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당국자들은 개개인의 사람들은 국가 이데올로기를 충실히 따르는 사회적 일꾼으로 기능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개개인들이 자의식을 지닌 채 국가의 이념에 저항하고 개인의 행복만을 추구한다면, 이는 국가의 관점에서 손해이기 때문입니다. 프로이트의 심리학이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과 동독 그리고 히틀러의 제3제국에서 철저히 비난당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기도 합니다.

 

4. 주인공의 내적 불안 그리고 세기말의 어둠에 대한 예리한 인지 행위가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나긴 산문시”로 평가되는 릴케의 산문 작품은 위에서 언급한 다른 작품들과 비교할 때 놀랍게도 한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주인공 말테의 내적 갈등과 불안입니다. 이는 주인공의 삶을 부분적으로 힘들게 할 정도의 심리적 상처였습니다. 이를테면 작품 속에는 릴케의 자전적인 경험이 묘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가령 산문작품에는 시인의 프라하에서 보낸 유년 시절, 루 살로메와 함께 체험했던 러시아 여행, 1904년 스칸디나비아 여행의 기록, 야콥센 Jakobsen, 키르케고르 Kierkegaard 등의 작품을 읽고 난 뒤의 느낌 그리고 “매 순간 자기 파멸로 이끌 것 같은” 파리 체험 등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릴케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과거 체험에서 접했던 아픈 기억들을 문학적으로 담았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세기말의 유럽의 현실에서 어떤 죽음과 불안이라는 징후 내지 마지막의 절망적인 분위기를 예리하게 감지해냈다고 말입니다. 작가는 시대의 지침계로 반응하는 존재라는 말이 여기에 적합한 것 같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전체적으로 릴케의 『말테의 수기』의 내용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항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말테의 파리 체험, 둘째, 말테의 유년의 기억, 셋째, 지나간 역사 내지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에 관한 말테의 논평 등이 바로 그 세 가지 사항입니다.

 

5. 살아가기 위해서 파리로 향하는 모양이다. 제 1부: 주인공은 덴마크 귀족 출신의 시인, 28세의 말테 라우리게 브리게입니다. 그는 부모를 잃고, 파리에서 시인으로 생활합니다. 세기말의 파리는 그야말로 거대한 도시로 변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어느 누구도 타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말테는 가난하게 생활하면서, 20세기 초의 파리 현실의 편린을 추적합니다. 생업에 열중하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 그들의 애환과 갈망의 모습을 관찰하는 것은 시인의 흥미를 불러일으킵니다. 파리의 복잡한 골목에서 역겨움, 질병 그리고 죽음에 관하여 숙고하기 시작합니다.

 

모든 것은 자신의 창작의 소재가 됩니다. 복잡하고 혼란스럽지만, 어딘지 모르게 암울함을 안겨주는 대도시 파리의 분위기는 시인에게서 (유년기에 느꼈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빼앗습니다. 한마디로 작품은 세기 말의 기본적 주조로서의 참담하고도 암울한 현실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말테는 더러운 현실을 받아들이고, 무언가를 문학적으로 표출시키려고 합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모든 것을 세밀하게 관찰합니다. 이로써 그는 사물의 겉과 속을 동시에 파악하는 능력을 키웁니다. 이로써 말테는 죽음과 병, 공포와 절망, 가난과 궁핍함, 언어와 형식에 관하여 차근차근하게 묘사해 나갑니다. 나아가 그의 관심사는 운명과 삶, 예술가와 사회, 사랑과 고독, 개별적 인간과 신에 관한 성찰로 향하고 있습니다.

 

6. 대도시의 삶과 유년의 시골에서의 삶: 주인공 말테는 주위 사물을 면밀하게 관찰하는 사람이며, 동시에 대도시의 거대함에 피해당하는 객체이기도 합니다. 말테 자신이 발견한 세상은 묘하게도 더러운 파리의 현실과 대비되고 있습니다. 첫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살아가기 위해 이 도시로 모여드는 모양이다.” 그러나 파리로 입성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주인공의 눈에는 죽기 위해서 이곳에 몰려드는 생명체로 비칠 뿐입니다. 주인공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파리의 어느 골목에서 지극히 가난하고 고독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말테는 어릴 때 잃어버린 미지의 무엇을 반추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면모를 새롭게 발견합니다. 여기서 독자들은 말테의 유년의 삶 그리고 대도시의 현실에 드러난 삶 사이의 커다란 괴리감을 감지하게 됩니다. 가령 말테의 뇌리에는 울스 가르트에 있는 브리게 城이, 유골 사원에서 어머니 가족들의 유물 등이 떠오르는가 하면, 어두운 식탁 아래의 기이한 손, 심령학적 분위기, 몰락의 위협으로서의 섹스 등이 소년으로 둔갑한 시인의 의식 속에서 어렴풋하게 투영되고 있습니다. 이렇듯 그의 기억은 주어진 현실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 나타나는 두려움을 떨치기 위한 공간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기억이라고 해서 말테에게 어떤 안식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