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글

마르크스, 뮌처, 혹은 악마의 궁둥이 서문

필자 (匹子) 2021. 5. 8. 11:06

“사고는 한계를 뛰어넘는 일을 일컫는다.” (Ernst Bloch)

“블로흐를 비판하지 않은 채, 그의 문장을 인용하는 것은 하나의 배반이다.” (편역자)

"희망은 확신이 아니다. 희망은 위험에 둘러싸여 있다. 그것은 위험에 대한 의식이다.” (Ernst Bloch)

 

1.

친애하는 B, 블로흐 읽기를 연속으로 간행하겠다고 호언장담했으나, 이후의 진행은 그다지 매끄럽지 못했습니다. 유토피아의 역사를 역사적 비판적 관점에서 기술하려는 의도는 세부 사항에 있어서 여러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토피아의 연구에서 동양의 영역을 제외했음에도, 논의에 대한 고증 작업은 여간 만만치 않았습니다. 자고로 학자는 -소설가와는 달리- 자발적 착상만으로 펜이 굴러 가는대로 글을 쓸 수 없으며, 사고가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기 전에 펜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게다가 학자라면 누구나 자신의 주장과 인용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나의 연구가 블로흐의 사상의 범위를 넘어서는 데 있었습니다. 유토피아의 역사를 기술하려면 블로흐의 사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전 세대의 학자가 아닌가요? 게다가 모든 새로운 사고는 어떠한 사상적 제한 속에서 개진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유토피아의 역사를 개관하려는 작업은 앞으로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에른스트 블로흐 읽기 (II)는 이전에 E북으로 간행된 바 있는 『뮌처, 마르크스, 혹은 악마의 궁둥이』로 대신하려고 합니다.

 

몇몇 문헌이 삭제되었지만, 추가로 첨가한 글들이 있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이를테면 츠베렌츠의「블로흐 테제」, 블로흐의 「니체의 사상적 자극」, 블로흐의 「대학, 마르크스주의, 철학」, 블로흐의 「마르크스에 나타난 인간 그리고 시토이앙」이 그것들입니다. 원고들은 오랫동안 서랍 속에 잠자고 있었으므로, 오랜 수정 작업이 가능했습니다. 『마르크스, 뮌처, 혹은 악마의 궁둥이』는 마치 오랫동안 묵혀둔 포도주처럼 귀한 물건 같아서, 나로서는 애착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2.

『뮌처, 마르크스, 혹은 악마의 궁둥이』는 블로흐의 사상의 핵심을 안고 있는 기독교 사상과 마르크스의 사상을 서로 비교함으로써, 다음의 결론을 도출해내고 있습니다. 즉 “블로흐의 사상은 결코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를 서로 합금시킨 게 아니다. 다시 말해서 블로흐의 사상은 언젠가 빌헬름 바이틀링 Wilhelm Weitling이 추구했던 ‘기독교적 마르크스주의’와는 근본적으로 차원을 달리한다.”는 게 바로 그 결론입니다. 블로흐는 뮌처의 종교 개혁의 발언과 그의 문헌을 자신의 유토피아적 종말론 사상을 도출하기 위한 자료로 활용한 반면에, 마르크스의 저작물들을 자신의 사상과 계급 문제의 근원적 토대로서 상호 접목시킬 수 있는 자료로 수용하였습니다. 이를 고려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뮌처에 대한 블로흐의 연구가 자신의 연구 주제를 확장시키는 노력으로 이해된다면, 마르크스의 사상은 블로흐에게 더 나은 삶을 위한 꿈을 추적하는 근본적인 토대로 활용되어 왔다고 말입니다.

 

상기한 이유로 인하여 본서의 제목은 “뮌처, 마르크스, 혹은 악마의 궁둥이”가 아니라, “마르크스, 뮌처, 혹은 악마의 궁둥이”로 바뀌어졌습니다. 제목의 순서 변화는 여기서 매우 중요합니다. 블로흐는 초기에 뮌처에 관한 책을 발표함으로써, 수많은 마르크스주의자로부터 오랫동안 수정주의 비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폭넓은 연구 대상의 설정으로 인하여, 엄청난 연구 영역을 모조리 포괄하여 상호 관련성을 추적했기 때문에 블로흐는 끊임없이 오해를 받아왔습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블로흐가 오늘날 철학과 정치경제학이 아니라, 유독 신학에서 회자되고 있는 경향을 하나의 좋은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미리 말씀드리건대 유토피아라는 철학, 문학과 예술, 법학, 정치경제학, 신학 사이의 상호 관련되는 학제적인 테마를 우선적으로 이해해야만, 우리는 블로흐의 사상적 뿌리를 비로소 제대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블로흐의 산문 『흔적들』이 블로흐의 다른 문헌의 내용을 문학적으로 압축한 텍스트라고 이해하면서, 제반 학문과의 유기적인 관련성을 예리하게 간파할 때, 우리는 비로소 블로흐의 사고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 블로흐의 학문 가운데 이를테면 신학의 부분 하나만 빼내어, 그 부분만 수용하려고 한다면, 이러한 처사는 장님 코끼리 더듬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3.

중요한 것은 연구 대상 자체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연구자의 시각내지는 관점이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블로흐의 연구 대상만을 염두에 두고 이를 비난하곤 하였습니다. 이를테면 카를 카우츠키 Karl Kautsky를 생각해 보세요. 20세기 전반기의 시기에 사람들은 “종교 갈등의 시기에 활동하던 개혁론자가 계급 문제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카우츠키의 발언을 성급하게 받아들여서, 블로흐를 신비주의 수정주의 철학자로 매도하기에 이릅니다. 심지어는 블로흐의 핵심 연구가라고 자처하는 한스 하인츠 홀츠 Hans Heinz Holz조차도 블로흐의 뮌처 연구를 마르크스 사상을 흐리게 만들고 방해하는 하나의 요인으로 용인한 바 있습니다. 말하자면 블로흐는 홀츠에 의하면 마르크스주의의 정곡을 찌르는 대신에 외부에 서성거리면서 변죽만 울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고로 마르크스를 비판하지 않은 채 그의 문장을 인용하는 것은 -극작가, 하이너 뮐러 Heiner Müller의 표현을 빌려 표현하건대- 그 자체 하나의 배반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홀츠의 견해 역시 어떤 측면에서는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견해를 내세우기 전에 일차적으로 블로흐의 문헌을 접해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그의 텍스트와 사상을 부분적으로 비판해나갈 수 있습니다. 내가 판단하기에 블로흐야 말로 마르크스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자신의 고유한 꿈과 저항의 철학을 개진한 사상가라고 여겨집니다.

 

마르크스도 블로흐도 우리와 다른 현실에서 살다간 학자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학문적 체계 내지 견해 역시 그들이 처한 현실적 상황을 고려하여 수용되어야 합니다. 자고로 우리에게는 절대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현실적 배경 하에서 참과 거짓이 가려질 뿐입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수정주의 운운하는 사람의 사고 자체가 철학적 이데올로기의 편협한 사고에 차단되어 있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나는 “뮌처, 마르크스, 혹은 악마의 궁둥이” 대신에 “마르크스, 뮌처, 혹은 악마의 궁둥이”라는 제목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4.

당신은 언젠가 다음과 같이 나에게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블로흐에 집착하는가? 마르크스주의 문예이론을 공부하면, 테오도르 아도르노 Th Adorno도 있고, 발터 벤야민 W. Benjamin도 있으며, 게오르크 루카치 G. Lukács도 있고, 뤼시앙 골드만 L. Goldmann도 있지 않는가? 하고 말입니다. 친애하는 B, 외람되거나 주관적인 견해일지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블로흐의 사상을 이들의 학문에 비해 군계일학으로 비유하고 싶습니다. 특히 놀라운 것은 블로흐가 인간의 끝없는 가능성으로서의 과정을 중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블로흐는 시대의 변화와 미래의 가능성을 추적하는 데 자신의 시각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의 희망의 개념은 결코 동어반복의 허사가 아니라, 몹시 유연한 시각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희망은 확신이 아니다. 희망은 위험에 둘러싸여 있다. 그것은 위험에 대한 의식이다.”라는 발언을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사회를 진단하고 예술을 이론적으로 규정하는 데 있어서 당신이 언급한 학자들의 문헌들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루카치를 제외하면- 미래를 위한 특정한 대안을 제시하는 데 너무 인색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특히 아도르노의 제반 견해들은 비판과 판단에는 강한 어조를 드러내지만, 미래에 대한 전망과 유토피아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침묵을 지킬 뿐입니다. 아니, 미래를 위한 대안을 처음부터 부정하는 학자가 바로 아도르노입니다. 그는 언젠가 블로흐와의 인터뷰에서 유토피아의 허구성을 증명해주는 단서가 죽음이라고 단호한 자세로 말했습니다. 혹자는 예술작품에서 유토피아의 흔적만 아쉬운 마음으로 찾으려는 아도르노의 예술론 역시 존재 가치를 지닌다고 말합니다. 물론 나 역시 그 점을 부분적으로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의 염세주의적이고 미래를 부정하는 차단된 시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5.

친애하는 B, 당신은 21세기에 새로 태어날 배달의 철학자입니다. 지금까지 나는 한 권의 블로흐 저서와 여덟 권의 역서를 간행하였습니다. 다섯 권의『희망의 원리』(2004),『중세 르네상스 철학 강의』(2008),『저항과 반역의 기독교』(2009),『자연법과 인간의 존엄성』(2011) 그리고 나의 저서,『꿈과 저항을 위하여』(2011)가 그것들입니다. 이것들은 누구보다도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나의 번역서와 저서에는 모자라는 내용이 많이 담겨 있지만, 부디 애정 어린 눈길로 이 책을 비판해주기를 바랍니다. 울력의 강동호 사장님에게 감사의 말씀 전하면서...

 

안산의 우거에서 편역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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