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고대 문헌

서로박: 플라톤의 '국가' (2)

필자 (匹子) 2018. 10. 24. 15:06

앞에서 나는 플라톤의 『국가』가 두 가지 이유에서 유토피아의 문헌학적 효시가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하나는 철저한 계층적 차이를 우선적으로 고려한 평등국가의 상이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시간과 장소를 고려하지 않는 초시대적인 모범적 범례로서의 상이기 때문입니다. 후자의 경우 그것은 역사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상이지요. 이는 플라톤이 대서양 저편에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미지의 아틀란티스를 상정했다는 점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친애하는 P, 그렇다고 해서 플라톤이 현실도피적인 태도로 자신의 이념 속에서 현실과 무관한 이상 국가를 건설했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플라톤은 국가의 세 가지 계층을 신체구조로 설명하였다.  아래에 있는 열정과 성욕은 생업에 종사하는 하부 계층을 지칭하고, 두 번째 용기 (심장 부분)  군인 내지 파수꾼을 지칭한다. 맨 위의 머리 부분은 지배계층을 지칭한다.

 

그렇다면 플라톤의 국가 설계는 당시의 정치적 현실에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요? 플라톤은 생전에 자신의 국가 설계가 실천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였습니다. 플라톤은 자신의 이상 국가를 실현하기 위하여 시라쿠사로 향해야 한다는 것을 하나의 사명으로 생각했습니다. 마흔의 나이에 플라톤은 위험을 감수하고 시라쿠사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것은 기원전 388년에서 387년 사이의 시기의 일이었지요. 플라톤은 디온 Dion과 교우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디온은 시라쿠스의 참주 디오니소스 1세의 사위였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그곳의 참주를 설득하여 처음에는 어떤 더 나은 왕국을 건설하려고 시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결실을 맺지 못하게 되자, 누군가 플라톤이 어떤 모반에 가담했다고 말하며, 그를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곳의 참주를 권좌에서 끌어내어 자신의 고유한 유토피아의 국가 이념을 실현하려고 음모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조용하고 고상한 아테네 출신의 귀족 철학자는 자신의 이론을 하나의 행동으로 실천함으로써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하였습니다. 천만 다행으로 플라톤은 목숨을 잃지는 않고, 노예 시장에 팔려 어디론가 떠났습니다.

 

이상 국가의 건설에 자신의 목숨을 팔아버린 남자, 플라톤은 나이 예순이 되었을 때 두 번째 여행길에 오릅니다. 이번에도 참주의 아들을 찾아갔습니다. 이때 플라톤은 오로지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한 일념에서 어린 독재자에게 직언을 서슴없이 던졌습니다. 그래서 시라쿠사의 사람들은 이번에는 아테네 출신의 체제파괴적인 철학자를 독살시키려 했습니다. 그는 다행히 독살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플라톤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고령의 나이에 이르러 세 번째로 시라쿠사로 여행하였습니다. 이번에도 자신의 견해는 체제 파괴적으로 간주되어, 플라톤은 다시금 실패를 맛보게 됩니다. 학교의 교과서에는 “플라톤 글 쓰다가 사망하다. (Platon scribens mortuus est.)”라고 기술되어 있으나, 이는 결코 중요한 사항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상기한 내용은 플라톤이 자신의 이념을 현실에 적용시키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한 철학자였음을 증명해주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솔론의 모습 

 

친애하는 P, 상기한 내용은 솔론 Solon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 의 문헌 「아테네 사람들의 국가 법 Αθέναιόν πολιτεία」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밖에도 헤로도토스 Herodot의 역사 제 3장 80 - 83절에도 기술되어 있습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공산주의에 관한 희극 「풍요로움 Pluto」에서 플라톤의 작품을 은근히 암시하며 국유 재산제도 그리고 생업의 공용화 등에 관해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건축가이자 도시 계획자인 히포다모스 Hippodamos는 과연 어떠한 방식으로 국가 공동체를 가장 효과적으로 축조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골몰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페리클레스와 함께 그리스남단의 피레우스 그리고 남부이탈리아의 식민지 투리오이의 건축물을 축조하는 작업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바 있습니다. 

 

상기한 내용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1. 플라톤의 『국가』는 비록 관념 속에서 축조된 가장 바람직한 국가 설계에 관한 모범적인 범례를 담고 있습니다. 2. 플라톤은 최소한 바람직한 국가상을 현실적으로 적용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3. 플라톤의 이러한 노력은 이후 세계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특히 세 번째 사항의 경우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지적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의 후기 작품 「수상 Politikos」 그리고 「법령들 Nomoi」등은 『국가』에 묘사된 내용을 다양한 관점에서 실행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 폴리비오스 등도 플라톤이 언급한 국가의 설계 문제를 뒤이어 연구한 바 있지요. 플라톤의 국가 연구는 후세에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키케로 역시 「공화국에 관하여 De re publica」 그리고 「법 규정에 관하여 De legibus」라든가 플루타르코스 Plutarch의 『군주 전치, 민주정치 그리고 과두 정치 Ρερι μοναρχιας και δέμοκρατιας και ολιγαρχιας』에서 플라톤의 국가의 내용을 자세히 인용하며, 이를 비판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