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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브라쉬의 극작품들 (5) 친애하는 게오르크

필자 (匹子) 2020. 9. 29. 11:35

실험적 극작품 「친애하는 게오르크 Lieber Georg」는 1988년 극작품 모음집 『사랑스러운 리타, 친애하는 게오르크, 메르체데스』으로 베를린에서 간행되었습니다. (Thomas Brasch: Lovely Rita, Lieber Georg, Mercedes. Theaterstücke, Frankfurt a. M. 2008).

 

여기서 말하는 “게오르크”는 1912년에 독일의 하벨 강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다가, 강물 아래로 빠져 비명횡사한 시인 게오르크 하임 (Georg Heym, 1887 - 1912)을 가리킵니다. 브라쉬는 요절한 게오르크 하임의 짧은 생애를 반추하면서, 시인과 예술가들이 현대의 산업 사회에서 겪어야 하는 냉대 그리고 주위 일상 사람들로부터 얻게 되는 소외감 등을 문학적으로 다루려고 하였습니다. 극작품은 코믹과 콜라주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로써 극작가는 작품 내의 사건에 대한 모든 인과율의 고리를 끊고, 제반 사항들의 관련성을 해체시키려고 의도합니다.

 

비록 작품이 게오르크 하임의 편지, 작품 그리고 일기 등을 소재로 이루어져 있지만, 모든 이야기는 결코 게오르크 하임의 삶으로 귀결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작품 속에 반영된 여러 가지 다양한, 가상적인 사건들은 게오르크 하임의 글을 빌려 표현되고 있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등장인물 게오르크가 삶에서 조우하는 여러 가지 유형의 갈등입니다. 가령 삶과 문학은 게오르크에게는 결코 하나로 결합될 수 없는 대립으로 비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브라쉬가 하이너 뮐러 Heiner Müller의 예술적 실험을 추종하는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연극은 뮐러에 의하면 갈등, 두 세력의 부딪침 그리고 모순 등에 관한 의식을 첨예화시키는 작업 바로 그것이라고 했는데, 아닌 게 아니라 갈등의 구조는 브라쉬의 작품 속에서 더욱 첨예화되고 있습니다.

 

 

 

 

 게오르크 하임

 

 

작품의 가장 중요한 사항은 인간 존재의 본질을 찾고 그것을 인식하는 작업입니다. 게오르크 주위에는 수많은 이름 없는 군상들이 서성거리고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에는 여성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제각기 자기 자신이 고유한 권한을 지닌 주체라고 의식합니다만, 외부에서 보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오로지 수많은 객체들로 투영되고 있을 뿐입니다. 이를테면 이들은 서로 친화적인 제스처를 취하지만, 서로 개인적 친분이 없으며, 고립된 개체들로 살아갈 뿐입니다.

 

게오르크는 이들과의 인간관계가 단절되어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식을 원하지 않으며, 자신의 존재가 후세에 이어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게오르크는 자신 그리고 주위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어떤 로봇과 같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그는 자신의 주위에 퍼져 있는 비인간적 삶의 조건들을 정확히 의식하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T, 작품의 주제가 불명확하다고요? 그럴지 모릅니다. 브라쉬가 「친애하는 게오르크」에서 중시한 것은 앞에서도 말한 바 있듯이 “갈등의 첨예화”이니까요. 분명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극작가는 게오르크 하임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무엇보다도 예술가로서 조우하는 현실적 모순을 분명하게 지적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삶과 문학은 결합될 수 없는 딜레마입니다. 예술가가 삶을 위해서 생업에 종사하면, 작품을 완성할 겨를이 없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예술가가 예술에 심혈을 기울이면, 끼니 얻기가 힘든 법이지요. 이렇듯 우리는 완성된 명작에 탄성을 터뜨리기보다는, 작품의 창조와 예술가의 작업 조건의 갈등 및 대립 구도를 인지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극작가는 20세기 초에 살던 게오르크 하임의 사회적 체험을 80년대 말에 동서독에서의 경험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두 개의 현실은 정치적 측면에서 그리고 역사적 배경에 있어서 서로 다르지만, 예술의 영역이 개인과 국가로부터 소외당한다는 점에서 공분모를 이루고 있습니다. 어쩌면 브라쉬는 다음과 같이 말하려 했는지 모릅니다. “친애하는 게오르크, 너도 나처럼 소외감과 고독을 느끼고 살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