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Bloch 번역

호르스터: 블로흐의 사상 (2)

필자 (匹子) 2021. 8. 24. 11:49

1961년 블로흐는 자신의 튀빙겐 첫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 “희망은 환멸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가?” - “분명히 그렇다. 굉장하지 않는가?” 그러니까 환멸은 희망이라는 남자 곁에 동행하는 여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과 대답은 블로흐의 실제 삶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블로흐는 제 1차, 제 2차 세계대전을 체험했다. 1933년 3월 6일 그는 1917년의 망명 국가였던 스위스로 재차 망명해야 했다. 1934년 그는 빈으로 가서 자신의 세 번째 부인 카롤라와 결혼했다. 1935년부터 두 사람은 파리에서 살았고, 1936년부터 1938년까지 프라하에서 생활했다. 1938년 그들은 배를 타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1948년 블로흐는 라이프치히 대학교의 교수 초빙에 응했다. 자신의 명확한 자의식은 라이프치히 대학교 첫 번째 강의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대학 학부의 요구를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으며, 요구에 응하는 조건으로서 미국에서 쓴 자신의 원고를 안전하게 전달해 달라고 청원했던 것이다.

 

50년대에 이르러 다음과 같은 글을 쓰자마자, 블로흐는 당 관료주의와 갈등관계에 놓이게 된다. “사회주의 10월 혁명은 다음과 같은 일을 추진하기 위해서 이룩된 것은 아니었다. 즉 우리가 모든 서방 세계가 오랫동안 기억하는 프랑스 혁명의 민주주의의 권리를 약간 달리 수용하여 이를 발전시키는 대신에, 그것을 잔일하게 시민주의의 정신으로 단정해버리고, 이를 삭제해버리는 일 말이다.” (『정치적 측정, 페스트의 시대, 3월 전기 (Politische Messungen, Pestzeit, Vormärz)』, 1970) 만약 마르크스가 “사유재산 제도의 철폐”에 관해 언급한다면, 그는 블로흐에 의하면 “자유, 억압에 항거하는 인민의 저항”을 파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계급만 지니는 게 아니라, (브레히트가 말한 바 있듯이) 어떤 경우에도 군화 발에 얼굴 밟히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블로흐는 동독에서 계급이라는 미명 하에 개인이 위험에 처한 채 억압당하고 있음을 예의 주시하였다. 1956년 그는 동베를린에 있는 독일 학문 아카데미 총회의 결론적 발언에서 사회 내의 비참한 상황을 가차 없이 공격하였다. 이로 인하여 1957년 블로흐는 강제로 정년퇴임 당했다. 마치 소크라테스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신랄하게 비난당했듯이, 블로흐는 그때부터 “젊은이들을 유혹하고 선동하는 자”로 간주되었다. 1957년 간행된 책 “에른스트 블로흐의 수정된 마르크스주의 (Ernst Blochs Revision des Marxismus)”는 무엇보다도 블로흐의 반영 이론, 계급 이론으로부터의 일탈, 시민적 계몽주의에 대한 블로흐의 긍정적 태도, 주체와 객체 내지 존재와 의식의 “피상적 변증법” 등을 첨예하게 비난하였다. 이제 블로흐의 사상은 기존하는 사회주의에 대해 공개적으로 모순을 드러내는 것으로 취급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40년대 말에 기존 사회주의에 대해 순수한 마음으로 충직한 태도를 드러내고, 국가 사회주의의 시대에 소련에 대해서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던가?

 

시간이 흐를수록 블로흐의 자유는 구동독에서 도저히 감내하지 못할 정도로 축소화된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이 건설되었을 때, 그는 가족들과 함께 서독에 여행 중이었다. 그동안 남겼던 자신의 원고를 서방세계로 빼낼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블로흐는 더 이상 구동독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블로흐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관점에서 전집을 간행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거주지로서 그는 튀빙겐을 택했다. 왜냐하면 이 도시는 셸링 (Schelling), 횔덜린 (Hölderlin) 그리고 헤겔 (Hegel)과 관련될 뿐 아니라, 이곳에서는 비교적 정치적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무엇보다도 학문에 몰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서독,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 체제에서 블로흐는 불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는 매우 역설적이 아닐 수 없다.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에서보다도 자본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에서 더 많은 자유를 누린다는 것 자체가 역설적이 아닌가?

 

1961년에 블로흐는 서독에서 처음으로 강연했는데, 이 강연은 “철학적 근본문제들. 아직 아닌 존재의 존재론 (Philosophische Grundfragen. Zur ontologie des Noch-Nicht-Seins)”이라는 제목으로 문헌으로 발표되었다. 이 강연은 블로흐 철학의 핵심적 사고가 응집된 것이다. 예컨대 만일 우리가 인간으로서 어떤 부족함을 체험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부족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게 될 것이다. 이는 인간의 본질적 면모이며, 나아가 어떤 인간학적 기본적 불변성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살아있는 한 무언가를 갈구하지 않는가? 이러한 사고는 그의 나이 22세 당시에 떠오른 것으로서, 1923년『유토피아의 정신 (Geist der Utopie)』제 2판에 맨 처음 집필되었다.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세계가 어떤 부족함을 지니고 있다면, 이러한 부족함을 제거하기 위한 경향성은 세계 속에 내재해 있다.

 

소유 없음 내지 결핍 등은 현재 도사리고 있는 무의 공허함이 첫 번째로 중개된 것이다. 굶주리는 자에게 음식이 없다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첫 번째로 표기될 수 있는 알림이다. 마찬가지로 알지 못하는 무엇 내지 수수께끼와 같은 신비로움은 질문하는 자에게 첫 번째로 표기될 수 있는 상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무의 뒤엉킴이요, 나아가 긴급히 해결되어야 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세계에서 사건으로 발생하는 모든 내용 역시 어느 장소에서 끊임없이 출현하고 다시 출현하는 무엇이다. (...)

 

우리는 오로지 살기 위해서만 살아가지 않는다. 우리가 그냥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살아가고 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그냥 존재한다는 공허한 사실 때문에 어떠한 무엇도 우리를 편안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사항 속에는 ‘어째서 그러한가?’라는 집요하게 꿰뚫는 물음이 우리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자의에 의해 비참한 처지를 선택하지는 않는 법이다. 비참한 상황은 그렇기에 더욱 견디기 어려운지 모른다. 그렇지만 바로 이러한 비참한 상황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 인간은 차제에 도래할지 모르는 ‘아직 도래하지 않는 더 나은 삶’에 대한 의식을 끊임없이 발전시킨다.

 

굶주림은 그 자체 어떤 완성되지 않은 세계의 끝없이 출현하는 전선에서 활동하는 놀라운 생산력으로 화하게 된다. 그렇다, 세계 밖으로 출현해나가려고 하는 모든 시도들은 그 자체 우리와 마주하고 있는 현실적 질료의 어떤 끝나지 않은 현상학이나 다름이 없다. 그것은 나중에 최종적인 무엇으로 등장하게 될 뿐, 최초에 확정된 무엇이 아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무소유의 변증법 속에서 추동되는 어떤 변증법적인 과정은 유토피아의 소유를 임신하고 있다고나 할까. 그것은 어떤 범례를 실험하고 검증하는 과정인데, 이러한 범례는 어떤 자신의 ‘아직 없음’에서 획득된 실체적 존재 내지 실존적 존재의 서서히 밝아오는 게 아닌가?

 

인간 삶에서 나타나는 “어째서?”라는 질문에 대해 인간이 말할 수 있는 대답은 다음과 같다. 즉 구체적 유토피아는 인간의 제반 역사 내지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제반 자연 등이 던지는 의미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무 (無) 속에서, 현재의 어두움 속에서 어떤 시작 내지 출발이 행해질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라. 그렇다면 이는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완결되지 않은 존재, 완성되지 않은 존재는 자신의 모든 본질을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해 나간다.

 

실제로 주어진 비참한 내용에 자극을 받은 채 그것은 자신의 본질 속에 도사린 무엇을 추적해나가는 것이다. 만약 그게 처음부터 완성되어 있다면, 과정도 추구하는 행위도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과정을 지속적으로 자극하는, 거기 없다는 사실 내지 소유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 내용도 존재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말이다. 존재가 완성되어 있다면, 산다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아무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