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Bloch 번역

호르스터: 블로흐의 사상 (1)

필자 (匹子) 2021. 8. 24. 11:46

블로흐의 주저 『희망의 원리』는 1938년부터 1947년 사이에 미국 망명 시에 집필되었으며, 제 1권은 구동독에서 1953년에 간행된 바 있다. 이 책은 여러 가지 대상을 다루면서 어떤 더 나은 삶에 대한 갈망이 인간을 추동하는 결정적인 모티브라는 사실을 피력하고 있다. 블로흐는 회화, 건축, 음악 그리고 문학 등의 제반 예술 장르를 하나씩 분석하고, 동화, 영화, 여행, 유행, 진열장, 춤, 무언극, 낮꿈과 밤꿈, 종교 그리고 신화 등을 차례로 거론하면서, 이들 속에 담긴 유토피아의 요소들을 해명해 나간다. 나아가 그는 통속 문학, 영화관, 일 년 시장, 축제 등의 영역을 긍정적으로 취급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어떤 소외되지 않은 사회적 정치적 현실 상태에 대한 희망의 가장 다양한 표현 형태들을 서술하는 작업이야 말로 대작 『희망의 원리』의 핵심적 내용일 것이다.

 

우리는 블로흐가 품고 있는 희망의 개념을 흔히 말하는 허무맹랑한 공중누각 내지 사적이고 효력 없는 갈망의 상과 혼동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희망은 세계 속에 내재해 있는 구체적 경향성에 의해서 항상 중개되는 무엇이다. 그것은 우리의 현 세계 속에 자리하는, 사악하게 발전된 무엇을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은 어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세계의 산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들은 어떤 무엇을 생산하려고 변화를 시도하는 사물들이다. 그것들은 그 자체 불완전하기 때문에 스스로 완전하게 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한다. “없다는 것은 어떤 무엇의 결핍이며, 이러한 결핍으로부터 떠나 있는 상태이다. 따라서 그것은 어떤 결핍된 무엇을 찾아서 계속 추동해나간다.”

 

따라서 희망은 주어진 사실 앞에서 자신의 고유한 의지를 포기하거나 스스로 체념하지 않는다. 구체적 유토피아는 가장 비참한 실제 현실로 향해 눈길을 돌린다. 이와 관련하여 블로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계의 과정은 아직 어디서도 완전히 획득된 게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어디서든 간에 실패로 돌아갔다고 단언할 수 없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지상에서 자신의 과정 속의 전철 기사일 수 있다. 기대하지 않은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바라는 바를 끝내 발견하게 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막연히 머뭇거리는 전철 기사로 행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블로흐의 『흔적들 (Spuren)』(1930)에 등장하는 자신의 꿈을 정복하려는 사기꾼처럼 그렇게 행동을 취해야 한다. 블로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시지 하나를 더 많이 가지고 싶은 꿈을 꾸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이 행하는 일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으며, 자신의 영역을 더욱더 증축시켜 나갈 수 있다. 설령 실제로 생산적이 아니라 하더라도, 인간은 자기 자신의 고유한 주장을 수미일관 펼쳐나가야 한다. 이러한 자기주장 없이는 우리는 더 높은 차원으로 뛰어오를 수 없다.

 

젊은 음악가 베토벤 역시 오래 전에 자신이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대단한 천재라고 간주하였다. 그렇지만 실제에 있어서 자신은 아직 무명의 존재에 불과한 루드비히 반 베토벤이 아닌가? 이러한 처참한 사실을 감지했을 때, 그는 기이한 방식으로 마치 고등 사기꾼처럼 행동하며, 처절할 정도로 음악 공부에 몰두하였다. 베토벤은 스스로 위대한 음악가가 되리라는, 어떠한 무엇에도 은폐될 수 없는 오만한 욕구를 긍정적으로 활용하였던 것이다. 만약 스스로 위대한 음악가일 수 있다는 대담성과 무례함을 견지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음악적 위대함은 결코 세상에 출현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이와 관련하여 블로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한 고등 사기술은 매우 기이한 무엇으로 인간의 내면에 머물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품고 있으며, 실제로 모든 사람이 얻을 수 있는 영광스러운 광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는 블로흐의 개인의 인생 역정과 구분되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블로흐는 자신에게 이러한 찬란한 광채가 주어지리라고 굳게 믿었다. 청춘 시절부터 블로흐는 불가능한 것들을 실현하려고 노력했다. 블로흐는 학교 시절에 형편없을 정도로 공부 못하는 학생이었고, 자신의 학문을 쌓아가는 데 부모는 조금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중에 블로흐는 20 세기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철학자로 거듭난다. 그러니까 『흔적들 (Spuren)』에 실린 모토는 블로흐의 삶의 역정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존재한다. 그러나 나는 나를 아직 지니지 않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변화될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책 한 권 간행하지 않은 블로흐는 마치 악동처럼 젊은 시절의 친구 게오르크 루카치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사실상 이미 허락된 바 있지만, 지금 나는 내 철학의 명성과 이와 관련된 압박감을 점차적으로 연출해볼까 하고 결심했다네. 게오르크, 자네에게 확신하건대 소련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서방의 모든 사람들은 나의 책에서 자기 자신의 고유한 문제가 다루어진다고 느끼게 될 거야. 그들은 내 책을 읽고난 뒤에 틀림없이 눈물 흘리거나 충격을 받을 걸세. 그게 아니라면 그들은 중요한 사항을 연결하는 위대한 사고에 대해 구원받는다는 느낌을 받게 될 걸세. 그것도 탄호이저 그리고 바그너의 성스러운 예술 앞에서 약한 모습으로 단 한 번 부들부들 떠는 게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감탄을 터뜨리는 경우 말일세. 그러면 그들의 내면에서 오류는 사라지고 모든 것은 따뜻하고도 작열하는, 명확한 불빛으로 가득 차게 될 거야. 어떤 거대한 삶의 건강함 그리고 안전한 기술 그리고 상호 연관되는 국가의 이념 그리고 어떤 거대한 건축과 연극 작품 등을 생각해 보게. 모든 사람들은 나를 섬기려 하고 추종할 수 있을 거야. 모두 내 믿음이 얼마나 강인한가? 하는 점을 깨닫게 될 거야. 그들은 일상의 가장 작은 시간에 이르기까지 신화의 청춘과 유년 그리고 새로운 중세 그리고 영원과의 새로운 만남 등에 휩싸이게 될 걸세. 나는 성령이며, 나와 만나는 사람들은 스스로 회귀하는 신을 체험하고 이를 만나게 될 테니까 말이야.”

 

블로흐의 이러한 초인적 특성은 주위 사람들의 평판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막스베버의 아내인 마리안네 베버는 다음과 같이 블로흐를 묘사하였다. “방금 어떤 유대인 철학자가 거기 있었습니다. 검은 머리를 칭칭 감은 젊은이는 대단한 자의식을 품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마치 새로운 메시아인 양 그렇게 행동했으며, 사람들이 그렇게 인정해주기를 원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도 블로흐는 그렇게 비쳤다. 블로흐는 자신의 첫 번째 부인 엘제 폰 슈트리츠키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엘제는 나의 철학 속에 도사린 절대적 진리를 굳게 믿고 있었다. 나의 철학은 성서와 마찬가지로 그미의 동일한 피 그리고 영역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그미는 나의 철학으로써 성서를, 성서로써 나의 철학을 해석했던 것이다. 내가 원고 혹은 책에다 밑줄을 그으면, 그미는 그것을 조용히 검열하곤 했다. 밑줄 그은 부분에 다른 무엇을 적어 넣으면, 그미는 이를 다만 부드럽게 표현하거나 이를 바르게 수정해 주었다. 내 작품에 대한 그미의 존경심과 숭배는 과히 절대적이었고, 그미의 사랑처럼 무제한적이었다.” 다른 글에서 블로흐는 죽은 아내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내가 죽지 않고 그미가 떠난 것은 오히려 잘된 일인지 모른다. 내가 죽었다면, 그미의 괴로움은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컸을 테고, 그미 역시 혼자 오래 살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에 관한 모든 게 보존되고 정리될 때까지만 생명을 유지할 게 분명했으니까.”

 

블로흐의 철학을 하나의 간단한 공식으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S (주체, 주어)는 아직 P (행위, 술어)가 되지 못했다.” 모든 주체는 그 자체 스스로 실현하려는 어떤 잠재적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 주체가 자신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모든 가능성들을 마침내 실현해내는 순간, 우리는 그게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블로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동원하고 있다. 오로지 신만이 모든 가능성을 완성시킬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블로흐가 어린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자신의 철학적 관건으로 생각한 대상은 바로 “유대주의 내지 기독교 사상의 천년 왕국설”. 바로 그것이었다.

 

블로흐의 첫 번째 저서는 20세기 초의 표현주의가 표방하는 행동성의 분위기 속에서 출현하였다. 이 책에서 블로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세계의 모든 영역과 모든 분야 속에서 그리스도의 입구를 개방하는 일이며, 역사의 마지막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것은 나아가 “역사의 마지막에 도사린 신을 소환하는 일인데, 신은 완결되지 않은 세계에 대한 어떤 유형학적 문제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논지는 블로흐가 1975년에 발표한 『세계의 실험 (Experimentum mundi)』에서도 그대로 기술되어 있다. 블로흐는 『희망의 원리 (Das Prinzip Hoffnung)』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르크스주의는 블로흐에게 “먼 목표”인 “모든 존재”로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과정의 단계에 불과하다. 블로흐에 의하면 마르크스주의는 유토피아 존재로 향하는 첫 번째 문이나 다름이 없다고 한다.

 

블로흐는 1964년 아도르노와의 대담에서 다음의 사항을 강조한다. 즉 사회주의는 메시아가 도래하기 전에 경제적 제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이다. 불완전함으로부터 완전함으로 이르는 어느 개인의 발전 과정을 고려할 때 한 그가 삶의 마지막에 이르러 신과 동일하거나 유사한 존재로 드러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보다도 더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물음은 없다고 한다. 1964년 어느 강연에서 블로흐는 신과의 동일성에 관한 질문에 대해 성서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나와 주님은 하나이노라.” 혹은 “나와 주님은 서로 유사하노라.”

 

이러한 기본적 자세는 블로흐의 청년기에 설정된 것인데, 50년이 지난 뒤에 간행된 책 『기독교 속의 무신론 (Atheismus im Christentum)』에서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이 책은 종교의 급진적 인간화를 담고 있는데, 종교의 문제를 천착한 블로흐의 핵심적 저작물이다. 이 책에서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질서정연하게 개진되고 있다. 즉 인간은 더 나은 무엇, 완성된 무엇, 모든 것 그리고 신과의 동일성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이 항상 신을 믿은 까닭은 블로흐에 의하면 무엇보다도 완전성에 대한 갈망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인간은 자신의 내면에 도사린 모든 가능성을 실현시키려고 의도하지 않는가?

 

질료 역시 주체와 마찬가지로 완전성을 추구해 나간다. 1972년에 발표된 『물질론의 문제점. 그 역사와 실체 (Das Materialismusproblem. Seine Geschichte und Substanz)』에서 블로흐는 서로 연결되는 두 개의 세계 영역을 언급하였다. 블로흐에 의하면 모든 가능성이 주체 속에 자리하고 있듯이, 세상 속에도 모든 가능성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문장은『희망의 원리 (Das Prinzip Hoffnung)』에서 그대로 발견된다.

 

내일은 오늘 속에 생동하고 있다. 사람들은 항상 내일에 관해 묻는다. 유토피아의 방향으로 향하는 면모들은 주어진 시대마다 제각기 달랐다. 즉 상들이 개별적으로 주어진 상황에 따라 제각기 이질적으로 보이듯이 말이다. 이에 반해서 유토피아의 방향은 어디서나 유사한 것이다. 말하자면 유토피아의 면모 속에 은폐되어 있는 목표는 동일한 것이었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유일하게 불변하는 무엇이다. 예컨대 행복, 자유, 소외되지 않은 삶, 황금의 시대, 우유와 꿀이 흐르는 나라, 영원히 여성적인 것, 작품 「피델리오」에 나타나는 트럼펫의 신호 그리고 부활절 이후의 그리스도의 형체로 화한 것들을 생각해 보라. 그것들은 수많은 모습 그리고 다양한 가치를 지닌 상들이지만, 모든 것들은 항상 침묵 속에서 스스로 제기하는 진리 주위에 서성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