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블로흐는 아직 완결되지 않은 존재로서의 존재를 “아직 아닌 존재 (das Noch-Nicht- Sein)”로 규정하였다. “아직 아닌 존재”는 “아직 아닌 의식” 내지 “의식되지 않은 무엇”과 연합 전전을 구축하고 있는데, 블로흐 이전의 형이상학에서는 학문적으로 명명된 바 없다. 이전의 형이상학에서는 존재는 처음부터 완결되어 있는 무엇으로 다루어졌다. 그러나 블로흐의 경우는 이를 배격한다. 때문에 블로흐의 철학은 새로운 형이상학이라고 명명될 수 있다. 그렇지만 블로흐가 과거의 형이상학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블로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의 다음과 같은 핵심적 사고를 차용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본질은 개별적으로 실존하고 있는 무엇과의 일치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한다. “아직 아닌 존재”의 존재론에서 블로흐는 말한다. 존재는 실존하는 무엇으로부터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다고 말이다. 그렇지만 실존하는 것은 불로흐에게는 “단편적인 본질 (das fragmenhafte Wesen)”에 해당할 뿐이다. 실존하는 것들은 블로흐에게는 어떤 아직 완결되지 않은 존재의 시도된 생산물들이다. 모든 존재는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해 나가려고 한다. 완성된 존재로 향하는 이러한 끊임없는 지속적 과정은 자동적으로 진척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끊임없는 지속적 과정을 위해서는 우선 어떤 실천이 반드시 요청된다. 실천적인 관여 행위는 마치 (앞에서 언급한) 고등 사기꾼처럼 실행의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역사의 뿌리는 노동하면서 무언가를 창조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주어진 제반 환경을 바꾸어나가고 이를 추월하지 않는가?”
1975년의 책, 『세계의 실험 (Experimentum mundi)』에서 블로흐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실천의 행위는 주어진 사실 내용을 항상 새롭게 고집하고 주장함으로써 끝내 성공을 거두게 되며, 결국 정해져야 할 무엇 뿐 아니라, 실현되어야 할 무엇을 출현하게 한다. 가령 우리는 사실 내용의 어떤 무엇에 관해 이미 언급했지만, 이는 주어진 현실 속에 이미 자리하고 있는 무엇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다만 인간의 인식 영역 속에 자신의 특성을 부여하는 무엇이다.
만약 이것이 밖으로 출현될 수 있으려면, 완전하게 규정되어질 수 있는 존재일 수 있도록, 우선 분명히 확실한 무엇으로 현실 속에 창조되어야 한다. 이러한 확실한 창조는 이미 주어진 현실 속의 경향적 가능성에 의존해 있다. 다시 말해서 존재가 분명히 창조되는가의 여부는 자신의 측면에서 개념 속으로 이전되어져야 하는 객관적 현실적 가능성들에 달려 있다. 객관적 현실적 가능성들 속에서 분명하게 검증되어야만 존재는 현실적인 무엇으로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실 내용으로 향해 더 멀리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객관적 현실적 가능성들에 대한 인식 내지 깨달음만으로는 충분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객관적 현실적 가능성들은 오로지 주체의 동인이 막강하게 자리하게 될 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 가령 주체의 동인이 역사적 과정 속에서 경제적 사회적 운행 계획과 일치되는 순간을 생각해 보라. 바로 이러한 순간에 주체들은 객관적 현실적으로 드러난 구체적 가능성에 포괄적으로 개입하여, 그것들을 어떤 분명한 실천 행위의 모티프로 이전시킬 것이다.
블로흐는 상기한 입장으로써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타난 제 2차 그리고 제 3차 국제 공산당 운동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였다. 당시의 많은 공산주의자들은 역사적 발전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블로흐가 말하는 희망은 “종국에 가서는 해피엔드로 끝나리라”는 많은 공산주의자들의 맹목적 확신과는 거리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1961년 튀빙겐 대학교 철학 강의를 시작할 때 블로흐는 다음과 같은 오래된 속담은 오늘날 유효하다고 말했다. “희망하거나 기대하는 일은 여러 사람들을 바보로 만든다.”
1977년 블로흐는 자신의 전집이 완성되고, 제자들과 함께 전집의 보충 판에 해당하는 『경향성- 잠재성- 유토피아 (Tendenz-Latenz-Utopie)』이 작업하는 가운데, 유명을 달리한다. 블로흐의 사후에 사람들은 오늘날 블로흐의 철학이 아직 유효한가? 하고 묻곤 하였다. 왜냐하면 우리의 용기를 잔인하게 꺾게 만드는 수많은 이유들이 이 세상에 출현했기 때문이다. 만약 블로흐가 살아 있으면, 그는 어쩌면 다음과 같이 말할지 모른다. 만약 우리가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는 아직도 “가능한 신호를 보내는 실험실 (Laboratorium possibilis salutis)”의 무언가를 시도하는 생산적 행위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고 말이다.
“세계의 실험 (Das Experimentum mundi)”은 아직 최종적 정지 상태에 도달하지 않았다. 그래, 블로흐는 다음과 같이 말할지 모른다. 즉 우리는 어쩌면 주위에서 “나쁘게 이루어진 내용들”을 과거보다도 더 많이 관찰하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 우리는 무엇보다도 나쁘게 이루어진 내용들을 통해서 하나의 범례를 제공하는 양자택일의 실천을 발전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
블로흐는 현재의 사악하게 된 현실적 상황을 역설적으로 어떤 용기를 북돋게 하는 신호로 이해할지 모른다. 마치 횔덜린이 그의 비가 「파트모스」에서 “위험이 있는 곳에서는 구원 역시 자란다. Wo Gefahr liegt, waechst das Rettende auch”고 노래했듯이 말이다. 블로흐는 살아있는 마지막 날까지 더 나은 인간 사회를 가로막고 있는 제반 사항들에 대해 완강히 저항하였다. 비상사태 법 그리고 제 218조 낙태 금지법, 야권 세력의 이른바 “체제 파괴적”이라고 하는 정치 행위 금지법 그리고 중성자탄 개발 등에 대해 열렬히 반대한 일들은 그의 실천적 저항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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