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다음의 책에 실려 있다. Ernst Bloch: Das Materialismusproblem. seine Geschichte und Substanz, Frankfurt a. M. 1985, S. 439 - 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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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증주의자들은 제각기 다른 대상을 연구하지만, 자신들이 추적하는 연구 대상을 도중에 멈추고 이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놀라운 공통적 특성을 보여줍니다. 이로써 그들이 연구하는 대상은 어떠한 것도 생략되지 않고 철저하게 과소평가되고 있습니다. 대신에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은 척도로서의 회의적 관점입니다. 인간의 감각으로 관찰될 수 있는 주어진 사항에 유효한 것은 오로지 이러한 척도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의 단초는 순수 사고의 경제학으로 발생합니다. 이를테면 에른스트 마흐는 어떤 사고의 단초를 모델에 합당한 것으로 규정합니다. 그렇지만 그가 목표로 삼는 자세는 오로지 인간의 사고 속의 “팩트”를 설정하고, 더 이상의 어떠한 가능성을 추적하려고 하지 않으려고 하는 태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학문적 추적 작업은 실증주의자들에게는 형이상학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형이상학적인 무엇은 실증주의자들에게 학문적으로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게 경험적으로 입증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연구자라면 누구나 인간으로서 형이상학적 질문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하나의 대답 대신에 침묵을 지키는 게 낫다고 합니다. 논리적 경험론을 주창한 루돌프 카르납 Rudolf Carnap은 위대한 형이상학을 어떤 부풀려서 설명된 “음악적 범례”라고 규정하였습니다. 형이상학은 카르납에 의하면 아무리 대답을 찾으려고 해도 어떠한 철학적 의미도 도출해낼 수 없는 무엇이라고 합니다.
실증주의자들은 어떤 주장에 대해 일단 신중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들은 추구하는 연구 대상을 더욱더 과소평가하고, 그들의 고유한 학문적 의향 자체를 통째로 부인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때로는 화를 불끈 내고, 완강하게 행동하다가, 연구 대상에 대한 검증마저 포기하고 결국에 이르면 독단적 자세를 취합니다. 제각기 주어진 것이 어떠한 특성을 드러내든 간에 실증주의자들은 어떠한 구분도 설정하지 않은 채 “주어진 경우”를 밝히려는 욕망을 드러낼 뿐입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 이것은 통상적으로 천박함의 공식이며, 나아가 기회주의적인 수용에 불과합니다. 언제나 주위를 엿보면서 다수의 견해를 따르면서 보다 순수한 정서를 마치 학문적인 공식으로 설정하는 자들이 바로 실증주의자들입니다.
실증주의자들은 오로지 물리적 사실들만 학문적 관건으로 이해합니다. 그렇기에 자연과학 가운데 수학에다 하나의 유일한 학문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실증주의자들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거의 한 번도 제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즉 자신이 다루는 눈앞의 사실들이 때로는 극한적으로 물화된 것들이 아닐까? 혹시 그것들은 어떤 변화의 과정을 통해 변모를 거듭한 다음 출현한 하나의 순간이 아닐까? 하는 질문을 생각해 보세요.
언젠가 마르크스 그리고 젊은 셸링이 말한 바 있듯이, 인간은 눈앞의 사실을 대하면서 절대로 “변모 das Fieri”를 망각해서는 곤란한 법입니다. 만약 과거의 사실을 다루는 역사학 그리고 사고의 변화 과정을 다루는 정신과학이 그야말로 단순히 “읽을거리로서의 문학 작품 belles lettres”으로, 다시 말해 최상의 경우 자연과학 다음으로 중요한 이등 학문으로 이해된다면, 우리는 변모의 과정을 거친 연구 대상 앞에서 그야말로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객관적으로 가능한 가치 평가의 문제 앞에서 지금까지 전개된 과정의 가치를 철저히 부인하기 마련입니다. 이로써 어떤 휴머니즘에 입각한 변모를 통해 가능한 평가 작업은 불필요할 정도로 생소한 무엇으로 취급당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는 주어진 사실만을 중시하는 과히 끔찍한 판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로써 무시되는 것은 자연법, 도덕, 종교 비판 그리고 종교 철학의 유형 속에 도시리고 있는 어떤 저항적 가치일 것입니다. 만약 눈앞의 사실에 대한 자연 과학적 가치만 중요한 것으로 부각되면, 다음과 같은 학문의 영역이 필연적으로 본연의 가치를 상실하게 되리라는 것은 자명합니다. 이를테면 도덕, 예술 그리고 종교 등과 관련된 비교 사회학 등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들의 학문 영역은 인문 사회과학에서 지금 여기에 주어진 현실만을 중시하는 풍토로 인하여 엄청난 피해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대신에 학문적으로 인정받고 장려되는 과목은 기존하는 무엇만을 찬양하는 학문일 것입니다.
가령 법-실증주의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인간과 사회의 변화 과정을 좌시하는 학문적 경향을 드러내는데, 그것은 예컨대 에피쿠로스 그리고 루소의 자연법의 가치를 방해하고, 이들의 진정한 비판적 촉수를 꺾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실증주의자들은 눈앞의 사실 그리고 지금 여기 주어져 있는 현실을 넘어서는 모든 사항을 제한하고 차단시키면서, 거기다 이른바 불가지론이라는 하나의 회의주의의 장애물을 설치합니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편안하게 어떤 비가시적인 연구 대상에 대해 어떤 불쾌함을 노골적으로 표명하지요.
실증주의자들이 얼마나 형이상학을 천시하고 저주하는가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우리는 의학 연구자들 그리고 스피노자 내지 헤겔 학문 사이를 구분하려고 하지 않는 그들의 태도를 접하면 족할 것입니다. 실증주의자들은 스스로의 연구 방식을 유일한 학문적 방법론이라고 주장하면서, 물질 이론을 하나의 허용되지 않은 형이상학이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데모크리토스와 플라톤의 “음악적 범례” (Carnap) 사이에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지적해주는 어떤 작은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는데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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