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L, 가난한 형편에 유학을 떠나 박사학위를 취득했지만, 필자의 내공은 여전히 깊지 못했습니다. 영재(英才)가 아니므로 이후에도 노력해야 한다고 자신을 다독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학에서의 교편생활은 뒷배 없는 일꾼의 끈덕지고 힘든 노동으로 이어졌습니다. 물론 연구 결과물은 풍족했지만, 노상 허겁지겁 쫓겨 다니듯 살았습니다. 이 와중에서 나의 위안은 무엇보다도 시 창작이었습니다. 뒤늦게 시집을 간행하려고 하니, 시편들은 마치 어두운 골방에 뒤엉킨 거미알처럼 보였습니다. 원래 문학 작품이란 발표 당시의 시대정신과의 관련성 속에서 만개하는 법입니다. 나의 시편들은 한국과 유럽이라는 두 개의 다른 현실에서 탄생하였으며, 수십 년 동안 마치 백설 공주처럼 잠자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독자의 관점에서 고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