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05 4

박설호: (4) 흙의 권리. 오르플리트 서한집. 서문

(앞에서 계속됩니다.) 13. 마지막으로 흙의 권리를 재론하려고 합니다. 여기에는 네 가지 함의가 숨어 있습니다. 첫 번째 사항은 유한한 생명의 처절함입니다. 부식질은 토양 유기체의 작용으로 식물을 탄생시키고, 자라게 하며 사멸하게 합니다. 생명의 기운은 봄이면 지상으로 솟구치고, 가을이면 지하로 내려갑니다. 가령 그리스 신화는 하데스의 페르제포네 납치라는 비유로 탄생과 사멸의 순환 과정을 설명한 바 있습니다. 식물의 기운은 겨울에는 지하에, 여름에는 지상에 머뭅니다. 생명체의 삶이 슬프고 애틋한 의미를 부여하는 까닭은 그 자체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무기물 그리고 생명의 종(種)은 무한으로 이어지지만, 생명체는 사멸을 전제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흙의 권리에 관한 두 번째 사항은 자식을 탄생시키는 여성성..

2 나의 글 2024.01.05

박설호: (3) 흙의 권리. 오르플리트 서한집. 서문

(앞에서 계속됩니다.) 9. 상기한 사항이 바로 오르플리트 서한집의 집필 계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필자의 편지에는 크고 작은 오류가 자리할지 모릅니다. 왜냐면 거기에는 필자의 주관적 판단 내지는 삶에 대한 구체적인 체험이 첨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판과 저항은 –역설적이지만- 어쩌면 부끄러운 체험에 대한 솔직한 고백을 통해서 더욱더 커다란 동력을 확보하지 않을까요? 중요한 것은 일방적 비판 대신에 자기비판의 성찰을 견지하는 일일지 모르겠습니다. 친애하는 M, 인간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타자에 대한 비판적 관심일 것입니다. 여기서 타자란 다른 사람일 수 있으며, 다른 세계일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독심술은 주어진 사항을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방식으로 고찰하려는 유연한 탐색의 ..

2 나의 글 2024.01.05

박설호: (2) 흙의 권리. 오프플리트 서한집. 서문

(앞에서 계속됩니다.) 5. 첫 번째는 분단과 불신이라는 폭력의 비합리성입니다. 불과 70년 전에 한반도에서 끔찍한 전쟁이 발생했습니다. 그 후로 우리 전의식의 배후에는 어떤 폭력의 명료한 현재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남북한의 긴장 관계 그리고 분단이라는 힘든 고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입니다. 고통과 상처의 아픔은 정치적 영역뿐 아니라, 인간관계의 심리 구조 속에서 두려움과 갈등을 조장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남북한은 물론이고, 사람들끼리 서로 신뢰하지 못하게 작용합니다. 이로 인하여 남한의 반공주의는 우리의 정치적 견해를 공정하게 수용하지 못하게 했으며, 북한의 전체주의 시스템은 개개인의 자유를 옥죄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과 불신의 고리를 끊어내는 일이야말로 ..

2 나의 글 2024.01.05

박설호: (1) 흙의 권리. 오르플리트 서한집. 서문

“흙의 권리는 유한한 생명의 처절함으로, 여성성의 우선권으로, 물질의 중요성으로, 죽음의 소중한 가치로 설명된다.” (필자)(필자) 1. 친애하는 M,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미지의 독자, 당신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대의 상처를 내밀하게 전하는 데에는 서간체가 가장 좋을 것 같았습니다. 내가 청년이었을 때, 도스토옙스키의 『가난한 사람들 Бедные люди』 (1844/45)을 읽고, 깊은 감동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습니다. 비록 찢어지게 가난하지만, 상대방을 깊이 애호하는 마카르 제브시킨 그리고 경제적 이유로 돈 많은 다른 사내를 선택해야 하는 바바라 도브로요브스카 사이의 이별은 참으로 애절한 것이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 가난한 사람들, 석영중 역, 열린책들 2010.) 그래, 편지는 ..

2 나의 글 2024.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