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Brecht

박설호: (3) 학생들과 함께 읽는 브레히트의 시, '후세사람들에게'

필자 (匹子) 2025. 5. 22. 09:23

(앞에서 계속됩니다.)

 

4. 두 번째 시 분석

 

과거형으로 표기된 두 번째 시는 한편으로는 브레히트의 행적을 간략히 요약하고 있을 뿐 아니라, 브레히트가 평생에 걸쳐 밝히려던 사회적 모순 구조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첫 번째 두 번째 시에 나타나는 변명과 고뇌의 술회는 자취를 감추고, 시대적 삶이 자신의 삶으로 선회되어 있다. 엄격한 시 형식을 갖춘 이 시는 도합 4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끝날 때마다 2행의 후렴이 이어진다.

 

무질서의 시대에 나는 도시로 왔네,

굶주림이 그곳을 지배하고 있을 때.

격동의 시대에 사람들과 합류하여

그들과 함께 격분했지.

이 땅에서 나에게 주어진

시대는 그렇게 흘러갔네.

 

「후세 사람들에게」는 결코 ‘역할 시 das Rollengedicht’가 아니다. 다시 말해 ‘나’는 바로 브레히트의 자신을 지칭한다. 첫 번째 연에서 묘사되는 현실은 바이마르 시대의 베를린과 뮌헨을 연상시킨다. 20년대에는 히틀러가 가담했던 뮌헨 폭동, 독일 공산당과 사민당의 갈등, 경제적 궁핍함과 대공황이 존재했다. 또한 우리는 50년대 초의 구동독의 현실을 고려할 수도 있다. 예컨대 1953년에 발생한 동베를린 사건을 생각해 보라.

1행에서 4행까지에서 시인의 시각은 지상의 궁핍한 삶과 사람들 사이의 갈등 그리고 투쟁 등에 가까이 밀착되어 있다. 이에 비하면 5행과 6행에서 시인은 멀리서 주어진 현실을 비가 (Elegie) 풍으로 회상한다. 이로써 두 번째 시는 “세상에 대한 잠언” (한스 마이어)으로 기능한다.

 

살육의 현장에서 나는 식사했고

살인자들 틈바구니에서 잠자려고 다리를 뻗었네.

대충 사랑을 나누곤 하였고

참을성 없이 자연을 바라보았지.

이 땅에서 나에게 주어진

시대는 그렇게 흘러갔네.

 

거대한 증오는 전쟁으로 치닫게 되면,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은 “살육자”의 본모습을 드러낸다. 이로써 사람들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서 “살인자”로 변하고, 시인은 이 틈바구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나라는 원래 멀리 떠나 있을수록, 시인에게 더욱더 가까이 느껴지는 객체일까? 자신과 동료의 안전을 위해 비자를 얻어야 하고, 위험 부담을 무릅쓴 채 비참한 현실에 대한 해결 방안을 끝없이 모색하며, 작업을 감행해야 한다. 그렇기에 현실은 시인에게 전혀 여유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대충”이라는 단어는 원어 그대로 번역하면 “조심성 없이”로 번역될 수 있으며, “자연”은 “매사”로 번안될 수 있다. 3행에서 “사랑”은 낭만성이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그렇기에 “대충 서둘러서” 살을 섞을 뿐이다. 그러나 실제 브레히트의 삶을 고려하면, 주위 환경이 열악했기 때문에 “대충” 사랑을 나눈 것은 아니다. 그의 시 「마리 A.에 대한 기억」, 「어느 젊은 여자에서 발견한 무엇」 그리고 「소네트」 연작 외설시 등을 염두에 둘 때, “대충 사랑을 나누”어야 했다는 그의 말은 신빙성이 희박하다. 실제로 브레히트에게 여자들은 사랑의 파트너이자, 뜻을 같이하는 동지이며, 작품 생산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동료였다.

현실적 여건은 암울했고, 그럴수록 시인의 피해 의식은 더욱 커지기만 했다. 죽음과 죽임의 현장에서 오직 삶을 영위하기 위해 살아가는 브레히트의 처지를 생각해 보라. 더욱이 그는 홀몸이 아니었다. 가족과 창작 팀을 이끌어야 하는 부담감을 안고 있었다. 안온한 여유를 지니지 못한 시인의 삶은 혁명적 초조감만 부추길 뿐이다.

 

내 시대의 거리는 늪으로 향했고,

도살자 앞에서 언어는 나를 배반했지.

거의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어. 그러나 희망했네,

내가 없으면 지배자는 더욱 편안히 앉아 있으리라고.

이 땅에서 나에게 주어진

시대는 그렇게 흘러갔네.

 

전쟁과 “무질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늪”과 같은 삶을 영위하게 한다. 번쩍이는 칼 앞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시인은 자신의 입장을 번복할 수밖에 없다. 󰡔갈릴레이의 생애󰡕에서 주인공이 권력 앞에서 자신의 지동설을 번복해야 했듯이, 폭력 앞에서 살아남는 길은 폭력보다 오래 살아남는 방법 밖에는 없다. 그렇기에 “도살자 앞에서 언어”는 어쩔 수 없이 시인을 “배반”해야 한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자신의 번복으로써 폭정과 가난 속에서 살아온 수많은 민중들의 희망을 송두리째 저버린다. 비록 나중에 “물체의 운동 법칙”을 발견하지만, 이는 번복의 엄청난 여파를 고려할 때 부수적인 사항일 뿐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처럼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하며, 죽음 앞에서 장렬히 독배를 들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살아남아 작품을 남겨야 할 것인가? 그러나 훌륭한 작품을 집필하는 것은 타인과 사회를 위한 일이 아닌가? 바로 이 점이 브레히트의 시에서 나타나는 세 번째 갈등과 모순이다.

 

시인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진리를 쓰는 데 있어서의 다섯 가지의 어려움에 관하여 Fünf Schwierigkeiten beim Schreiben der Wahrheit」에서 브레히트는 “살아남으면서, ‘꾀 (List)’를 사용하며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자신의 행동 관으로 삼았다. 이로써 그는 권력자가 자신을 “눈 위의 가시 Dorn im Auge”로 간주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시인은 아무런 영향력이 없는 초라한 지식인 한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이 발언이 무조건 탄식의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니다. 오히려 브레히트의 시는 역으로 탄식 내지는 자기비판이라는 수단을 통해 궁극적으로 저항을 드러낸다. 시인의 사명은 “업적” 내지는 “생색내기”를 중시하지 않고, 동시대인에게 “유용한 무엇”을 전해주는 것이다.

 

힘은 미약했지. 목표는

아주 먼 곳에 위치하고 있었네.

비록 거의 도달할 수 없더라도

내 눈에 분명히 보였지.

이 땅에서 나에게 주어진

시대는 그렇게 흘러갔네.

 

여기서 긍정적 의미로서의 시인의 유토피아가 어떤 명확하지 않은 지평으로 묘사되고 있다. “목표”는 제 3제국의 현실 상황뿐이 아니라, 브레히트가 살던 구동독의 상황과 관련하여 의식된 것이다. 브레히트는 문학 작품 속에서 보다 나은 상을 한 번도 긍정적으로 설계한 일이 없다. 또한 극작품속에서 긍정적이자 모범적인 인간상을 구현하는 등장인물도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인간은 오직 어려운 상황에서만 무언가 보다 나은 미래를 갈구할 뿐이다. 어려운 상황을 겪지 않는 사람은 전혀 보다 나은 삶을 갈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에게 유토피아는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브레히트는 마르크스의 “부정의 부정”이라는 원칙을 철저히 고수하였다.

 

엥겔스가 인간이 최후로 도달할 수 있는 유토피아를 과학적 사회주의로 정식화한 반면에, 마르크스는 “계급 없는 사회”를 명확히 확정짓지 않았다. 이는 마르크스의 예리한 통찰과 숙고에서 나온 것이다. 말하자면 마르크스는 법칙이나 철칙으로 확정되지 않은 평등 사회의 가능성을 개방시키려고 의도했던 것이다. 브레히트 역시 강대국 사이에서 어부지리로 탄생한 구동독을 이상적 사회주의 국가로 간주하지 않았다. 브레히트의 견해에 의하면 “진정한 진보는/ 발전되어 있는 게 아니라,/ 발전하는 행위이다./ 진정한 진보는 발전을 가능케 하고/ 이를 강요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보다 인간의 나은 삶을 보장해 줄 갈망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계속 제기된다.

 

“이 땅에서 나에게 주어진/ 시대는 그렇게 흘러갔네”.. 이는 성서에 나오는 모세의 입장과 마찬가지이다. 모세는 축복의 땅을 바라보나, 발을 디디지 못했다. (출애굽기 3장 24절을 참고하라.) 비가 풍의 표현은 그 자체 아이러니이며, 어떤 모순을 담고 있다. 그밖에 어떤 명확하지 않는 지평은 “아주 먼 곳에 위치하고 있”다. 시인이 기리는 이상은 눈에 분명히 보이나, 도저히 도달할 수 없을 것만 같아 보인다. 바로 이 점이야 말로 이 시가 보여주는 네 번째 갈등과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브레히트의 이 연을 “진정한 강림의 분위기 (echte Adventstimmung)”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예컨대 그는 "희망의 원리"에서 유토피아를 무지개 내지는 헬레나에 비유한다.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무지개는 추적하는 자로부터 멀어지지 않는가? 희망은 이렇듯 그 속성상 환멸과 실망을 낳는다. 산도르 페퇴피 S. Petöfi가 말한 대로 “희망은 마치 카르멘과 같은 창녀”로서, 돈 호세가 모든 정을 다 바칠 때, 그를 저버린다. 이렇듯 유토피아는 지금 이곳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인간의 갈망이 삶의 동인으로 작용한다. 문제는 (칸트도 「어느 환시자의 꿈들 Träumen eines Geistsehers」에서 말한 바 있듯이) 오성의 천칭은 결코 공평하지 않다는 점이다. 언제나 미래의 희망이라고 적힌 쪽이 현재의 사실이라고 적힌 다른 쪽보다 무겁기 마련이다.

 

(4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