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Brecht

박설호: (1) 학생들과 함께 읽는 브레히트의 시, '후세 사람들에게'

필자 (匹子) 2025. 5. 20. 11:35

- 해답은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배우거나 가르치는 우리는 그저 여러 가지 질문만 던지면 족하다. 다만 언제, 어디서, 무엇이, 왜, 어떻게 일어났는가? 하는 사실 혹은 가설만이 전달되어야 하리라. 처음부터 한가지의 결론을 강요하지 말라. 그것은 비교육적이다. “너희에게 좋은 것을 스스로의 입장에서 결정해야” (브레히트) 하니까. -

 

1. 들어가는 말

 

언젠가 독문학 박사 과정에 있던 후배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70년대 이후로 독일에서 진행된 시학 논쟁에서 학자들은 한결같이 브레히트를 긍정적으로 인용하더군요. 서로 정반대되는 입장을 지니고 있는데도... 브레히트가 작품을 많이 써서 그럴까요?” 이 순간 나의 뇌리에는 어느 토론 장면이 떠올랐다. 서로 다투는 두 사람 논객의 손에는 제각기 브레히트의 텍스트가 들려 있고, 그들 사이에 브레히트가 앉아서 눈시울을 찌푸리고 있는 그러한 가상적인 상이었다...

 

그러나 ‘장님 코끼리 더듬는 식’이라는 비유는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 브레히트만큼 작품의 전달 가능성을 중시한 작가도 드물다. 또한 브레히트는 흔히 한계 상황에서 “당하지 않기 위하여” 교활하게 행동헀다고 하지만, 그의 문학만은 기회주의적 변절과는 거리가 멀다. (각주: 90년대에 브레히트 역시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른다. 기이한 것은 다른 지식인에 비해서 브레히트의 기회주의적 태도에 대한 비판은 의외로 그 강도가 약하다는 점이다. Siehe M. Rohrwasser: Der Stalinismus und die Renegaten. Die Literatur der Exkommunisten, Stuttgart 1993, S. 160 - 167. 이에 비해 블로흐의 친 스탈린주의의 발언에 대한 로어바서의 비난은 지나칠 정도로 첨예하다. 로어바서는 블로흐의 책 "이 시대의 유산"만을 부분적으로 인용할 뿐, 블로흐의 19권의 저서들을 도외시하고 있다.).

 

어째서 브레히트는 80년대 말까지 독문학계에서 소위 전혀 다른 입장을 지닌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는가? 과연 브레히트의 작품 역시 (문학론에 관한 그의 글과 마찬가지로) 이현령 비현령 식으로 해석되어도 좋은가?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 필자는 단연코 ‘아니오’라고 대답하고 싶다. (각주: 예컨대 브레히트는 󰡔서푼짜리 오페라󰡕의 관객들에 대해서 얼마나 실망을 금치 못했는가? ‘맥키의 칼’이라는 노래를 듣는 노동자 관객들은 계급의식은커녕 아름다운 멜로디에 콧노래만 불렀던 것을 생각해 보라. 비록 돈을 벌기는 했으나, 답답함을 떨칠 수 없었던 브레히트는 방대한 󰡔서푼짜리 소설󰡕을 집필하였다. 허나 이 소설을 이해한 노동자들은 불과 몇 사람에 불과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즉 만약 브레히트의 작품을 그의 시대와 관련하여 이해하려 한다면, 우리는 시각의 편차를 어느 정도 납득할 수는 있다.

 

망명 시에 브레히트는 문학 작품의 교훈적 특성을 유희적 특성의 우위에 두었다. 이에 반해 1948년 이후에 동독에 살게 되었을 때, 그는 “예술의 수단은 가르침이요, 그 목적은 즐김이다.” 라고 기술하였다. (각주: Siehe Bertolt Brecht: 28. 12. 52, Arbeitsjournal, Bd. 2, Frankfurt a. M. 1973, S. 1003.). 말하자면 주어진 현실의 풍토가 현저하게 바뀌었기 때문에, 이에 상응하여 문학과 예술에 관한 다른 입장이 제기된 것이다. 실제로 히틀러의 폭력은 브레히트에게 예술의 유희적 특성을 강조할 여유를 제공하지 않았다. 이에 비하면 구동독은 브레히트에게는 예술의 교훈성 정치성을 경직될 정도로 과장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각주: 그렇기에 “만약 브레히트가 수십 대의 차량이 복잡하게 달리는 서울에서 살았더라면, 그는 전혀 다른 작품을 집필했을 것”이라는 얀 크노프 (J. Knopf)의 말을 생각해 보라.).

 

그리스의 격언에 의하면 “한 가지 질문에 대해서 ‘예’ 그리고 동시에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것은 오류이며 정당하지 못하다.”고 한다. 그러나 오직 다음의 사항을 전제로 한다면, 우리는 한 가지 질문에 대해서 그 경우에만 ‘예’ 그리고 동시에 ‘아니오’라고 대답할 수 있다. 즉 주어진 현실적 맥락의 상관관계가 다르다는 사항 말이다. 예컨대 독일의 민족주의는 제 3세계의 민족주의와는 달리 이해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논리적 사고의 한계를 여러 가지 현실적 맥락이라는 상대성을 통해 극복해야 한다. 우리는 어떠한 시대적 상황에서 그리고 화자의 어떠한 의도에서 나온 발언인지를 미리 고려해야 한다. 특히 브레히트의 문학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완전히 만들어진 음식이 아니라, 음식의 원재료이며, 당의정이 아니라, 거름이다. 그렇기에 브레히트의 독자는 비판 의식이라는 체를 필요로 한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브레히트의 시 「후세 사람들에게」를 세밀히 분석하고자 한다. (각주: 「후세 사람들에게」는 다음의 책에 실려 있다.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김광규 역, 서울 1985, 109 - 113쪽; M. 케스팅: 브레히트 평전. 삶과 문학, 홍승용 역, 서울 1992, 191 - 194쪽.). 미리 말하자면 「후세 사람들에게」는 평생에 걸친 문학관의 핵심적 사항이 행과 행 사이에 압축되어 있다. 이 작품은 1934년에서 1938년경에 집필되었지만, 필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에서 구동독의 현실적 상황도 고려의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첫째로 「후세 사람들에게」는 전 생애에 걸쳐 창작 활동을 지속한 작가의 최후의 발언으로 이해될 수 있다. 둘째로 브레히트는 과거에 발표했던 자신의 작품을 개작하였는데, 「후세 사람들에게」도 바로 그러한 개작의 계획에서 제외되지는 않았다. (각주: Siehe Brecht: Arbeitsjournal, 2. Band, a. a. O., S. 887.).

 

2. 「후세 사람들에게」의 전반적 특성

 

1938년 "스벤드보르 시편"을 간행한 뒤부터 브레히트는 정형시의 구조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자유시의 형식을 주로 사용하였다. 브레히트에게 정형시란 고전주의 문학 및 몰락하는 시민주의 사회에 대한 패러디로 사용될 수 있지만, 새로운 사회주의 문학이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형식으로서는 불충분한 것이었다. (각주: 그렇다고 해서 브레히트가 40년대 이후부터 정형적 운율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그의 「전쟁 교과서 (Kriegsfibel)」은 전형적인 사행시로 이루어져 있다. 그밖에 브레히트는 남녀 간의 사랑의 시를 집필할 경우 의도적으로 소네트 형식을 사용하였다. 이는 전통적 연애시를 비판하고, 낭만주의적 요소를 배제하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이렇듯 브레히트의 연애 시는 사랑을 마르크스주의의 방식으로 전복 (das Auf-Den-Kopf-Stellen)시키는 셈이다.). 왜냐하면 정형적 리듬은 -브레히트에 의하면 시적인 분위기 내지는 정취의 내용을 담고 있어서, 독자의 의식을 일깨우기는커녕, 기껏해야 “자장가”의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각주: Siehe B. Brecht: Über Lyrik, Frankfurt a. M. 1964, S. 87.).

 

브레히트는 문학의 사용 가치를 가장 중시했다. 한계 상황에서 시가 행해야 할 임무는 -비유적으로 말하면- “금 (金)의 세공업”이 아니라, 조난을 알리는 “병 통신술”이다. 고해의 바다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사람 살려”라는 비명이 아니던가? 이렇듯 브레히트의 시는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는 것을 일차적인 목표로 삼는다. (특히 브레히트의 후기 시는 이러한 일차적 의미의 배후에 또 다른 의미를 묘하게 숨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도적 모호성은 고트프리트 벤 (Gottfried Benn)등과 같은 시민주의 시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난해성과는 다른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또 한 가지 생략될 수 없는 것은 작품의 간결성 내지는 단순성이다. 브레히트의 시와 관련하여 에른스트 피셔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브레히트는 본질적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생략하는 데 있어서의 대가이다. 그러나 생략과 축소, 예술적 절약에 대한 그의 방법론은 결코 추상성으로 향하지 않고, 구체성 내지는 표현하려는 대상의 단순한 형태로 응집된다.” (각주: E. Fischer: Das Einfache, das schwer zu machen ist, in: Sinn und Form, 9 Jg. (1957), S. 124 - 138, Hier S. 131.).

그밖에 우리는 직설적 발언, 아이러니와 풍자를 담은 산문성을 브레히트 시의 특성으로서 지적할 수 있다. 시민주의의 시작품이 정태적 묘사나 관조, 관형어를 동원한 명사적 표현을 선호하는 반면에, 브레히트의 시작품은 동태적 행위 혹은 실천 및 술어를 동원한 동사적 표현 방식을 지향한다. 이러한 제반 특성은 비록 구동독 시인들에게 뿐이 아니라, 정치성을 강조하는 서독 시인들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 에리히 프리트 등)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후세 사람들에게」는 세편의 연작 자유시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구도는 주제 상으로 볼 때 독자로 하여금 어떤 변증법적 관련성을 유추하게 한다. 첫 번째 시 (I)가 현재형으로 쓰여 있다면, 두 번째 시 (II)는 과거형으로 기술되고 있고, 세 번째 시 (III)는 미래형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세 번째 시는 미래 사실을 미리 말하지 않고, 미래에 살게 될 사람들에게 무언가 고백하고 있을 뿐이다. 이로써 브레히트는 현재, 과거에 나타나는 모순을 지적함으로써, 후세 사람들에게 해답이 아니라, 이해를 구하려고 한다. 그런데 첫 번째 시에서 ‘나’의 발언은 동시대인에게, 세 번째 시에서는 후세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향하고 있다. 그런데 두 번째 시는 비가풍의 독백 형식을 채택하고 있다. (각주: 비르기트 레르멘은 시 작품 전체가 ‘너희’라는 후세 사람들에게 향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두 번째 시는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 Vgl. B. Lermen: Ich lebe in finsteren Zeiten, ein alarmierender Ruf nach der Menschlichkeit des Menschen, Bonn 1989, S. 5.).

 

또한 세편의 시에서 나타나는 모순과 갈등 관계는 차이를 지니고 있으나, 독자에게 상호 관련성을 통해 어떤 변증법적인 해결책을 요구하고 있다. 예컨대 첫 번째 시가 ‘나’와 세상 사이의 모순을 다루고 있다면, 두 번째 시는 부분적으로 ‘나’와 동시대인 사이의 갈등이 묘사되고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시에서 ‘나’와 동시대인들과 주어진 현실이 삼각관계를 이루고 있다면, 세 번째 시에서는 ‘우리’가 등장한다. 이로써 “암울한 시대”에 살았던 ‘우리’의 발언은 새로이 “출현한” ‘너희’에게 향하고 있다. (각주: 그렇기에 「후세 사람들에게」는 엄밀한 담시의 특성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무릇 담시 (Ballade)는 문학의 세 가지 요소가 모조리 담겨 있는 시형식이다. 김지하의 담시를 생각해 보라. 담시 속에는 시적 요소인 “운율”이 나타나야 하며, 극적 요소인 “대화”가 등장해야 하고, 서사적 요소인 “스토리”가 이어져야 한다. 브레히트의 시에는 “대화”, “운율” 등이 제거되어 있다.).

 

(계속 이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