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한국 문학

(명시 소개) 서로박: (4) 함석헌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

필자 (匹子) 2024. 12. 10. 11:03

(앞에서 계속됩니다.)

 

6.

 

B: 그렇다면 종교적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는데요. 앞에서 언급한 강수택의 논문에서도 제기된 바 있듯이, 씨ᄋᆞᆯ이 일반 사람들 가리키는가, 지식인을 아우르는가? 하는 물음은 분명히 규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A: 한마디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함석헌의 “씨ᄋᆞᆯ”이라는 존재는 민초(民草)를 가리킵니다. 그렇지만 씨ᄋᆞᆯ이 인간의 몸 가운데 발이라면, 지식인은 신경세포가 집중되어 있는 인간의 뇌라고 말할 수 있지요. 그러나 신체조직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기능 역시 상호 작용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지식인 가운데 씨ᄋᆞᆯ이 존재할 수 있지요. 함석헌의 “씨ᄋᆞᆯ은 생명체의 원형과 얼마든지 연결될 수 있습니다. 김경재는 씨ᄋᆞᆯ의 의미를 동학 운동을 벌이는 민초에서 발견하려고 했습니다. (김경재: 동학 사상과 씨ᄋᆞᆯ 사상, in: 씨ᄋᆞᆯ의 소리, 통권 246호, 2016, 9.10월호)

 

B: 시적 자아는 다음과 같이 천명합니다. “온 세상이 다 나를” 저버릴 때에도 믿음과 사랑을 베푸는 자가 있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바로 그리스도를 가리키지 않을까요?

A: 가령 붉은 그리스도일 수 있지요. 왜냐면 그분은 교회 내부가 아니라, “힘들게 살아가고 무거운 짐을 진 채 생활하며, 경멸당하고 모욕당하는 존재로 취급받는” 사람들 곁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Karl Marx: Zur Kritik der Hegelschen Rechtsphilosophie, Vorrede, MEW, Bd 1, Dietz: Berlin 1968, S. 385.)

 

B: 함석헌이 말하는 “씨ᄋᆞᆯ”이 무산계급을 가리킨다면, 여기에는 영성적 의미가 빠져 있는 게 아닐까요?

A: 동의합니다. 씨ᄋᆞᆯ은 폭정과 외세의 침탈에 항거하는 농민들이며, 억압 속에서 목숨을 이어나가는 가난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믿음과 생명의 정신이 자리한다는 점에서 영성이 생략될 수는 없습니다.

B: 함석헌 선생의 사상을 마르크스와 비교하는 것은 의외가 아닐까요?

A: 그렇지 않습니다. 씨ᄋᆞᆯ의 상징성은 매우 포괄적입니다. 정의로움과 평화를 추구하는 종교 단체를 생각해 보세요. 아니, 씨ᄋᆞᆯ은 종교 단체가 아니라, 성령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는 개개인일 수 있습니다.

 

B: 중세 이후로 유럽에서는 신비주의 사상과 평신도 운동이 이어졌다고 하지요?

A: 폭정과 가난 속에서 살아가던 신앙인들은 기톨릭 교회를 찾아가지 않고, 집에서 혼자 촛불을 켜놓고, “세상의; 빛을 위해” 기도하곤 하였습니다. 오래전부터 사제들은 권력자들과 야합하여, 자신의 기득권을 누리고 살았습니다. 이로써 신앙의 지침은 주어진 체제를 옹호하고, 기득권의 안정을 도모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게 되었지요.

B: 토마스 뮌처Thomas Müntzer는 16세기 독일에서 제후 그리고 마르틴 루터와 같은 체제옹호적 수사를 노골적으로 비판하며 농민 전쟁을 이끌었지요.

 

A: 좋은 범례입니다. 아니, 그 이전에 살았던 에크하르트 선사Meister Eckhart의 구도 정신을 생각해 보세요. 그분은 누구든 간에 기도와 명상을 통해서 어떤 “고정되어 있는 지금nunc stans”의 시점에서 성령이 인간의 내면 속에 파고들 수 있다고 일갈했습니다. 근대에 미국에서 퀘이커 교도들은 신부 그리고 목사 없이 신앙생활을 영위했는데, 이러한 풍습 역시 유럽에서 나타난 평신도 운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모든 권위주의 내지는 지배의 체제 등을 부정하는 신앙은 탈권위주의에 해당하며, 이것은 사랑의 공산주의와 연결될 수 있다고 봅니다.

 

7.

 

B: 마지막으로 질문드리겠습니다. 함석헌 시의 다섯 번째의 철학적 관점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요?

A: 우리는 제 4연에서 어떤 해석의 출발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이 대목은 한 시대를 뛰어넘어 계승될 수 있는 믿음과 사상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뜻의 연대 내지는 믿음의 계승에 관한 문제이지요. 말하자면 스승과 제자 사이의 맹약을 거론하고 있다고나 할까요?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인도의 종교시 가운데에는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가 있습니다.

B: 함석헌 선생은 이 문헌과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등을 번역한 분이 함석헌 선생이지요?

 

A: 그렇습니다. 『바가바드 기타』는 “위대한 분의 노래”라고 번역되는데, 한마디로 전쟁이라는 끔찍한 삶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은사인 크리슈나 그리고 제자인 아르주나가 그들이지요. 크리슈나는 전쟁터에서 싸우는 왕자인 아르주나에게 신의 본질과 인식의 방식에 관해서 가르쳐줍니다. 갈등과 거짓 그리고 위선으로 뒤엉킨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의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설파합니다. 인간의 문명은 언젠가는 파괴되지만, 힌두교에서 말하는 근원적 의식에 대한 경험은 영속적으로 머문다는 것입니다.

B: 인도의 사상가 마하트마 간디는 바가바드 기타에서 비폭력 사상을 도출해 내었습니다. 영국 제국주의로부터 인도의 문화를 지키려면, 비폭력을 활용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함석헌은 번역의 과정에서 비폭력 사상을 강조한 것 같지 않는데요?

 

A: 동의합니다. 그는 인도의 문헌에서 간디처럼 비폭력주의를 도출해내지는 않았습니다. (박홍규: 함석헌과 간디의 종교관 비교. 『바가바드 기타』에 대한 헤석을 중심으로, in: 석당 논총, 56권, 2013, 83 – 135.) 어쩌면 함석헌은 『바가바드 기타』 연구를 통해서 씨ᄋᆞᆯ의 연대, 뜻의 계승을 강조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하나의 참된 사상이 무르익고 발전하려면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사이의 교감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교감은 크리슈나와 아르주나 사이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마치 씨앗 하나가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듯이, 하나의 뜻은 많은 인간과 생명체의 관심을 부추겨서 실질적인 결실을 이루어야 하지요. 이는 그리스도의 정신이 성령의 불꽃으로서 기독교인들의 가슴속으로 퍼져나가는 과정과도 같습니다.

 

B: 중요한 것은 “세상”의 “빛”이며, 이를 계승하는 분들은 뜻있는 후세 사람들이라는 말씀이로군요.

A: 그렇습니다. 시인은 여기서 작은 불빛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아르주나처럼 뜻을 같이하는, 이름 모른 제자들에 대한 기대감과 결부된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말하는 성령의 불꽃으로 이해될 수 있어요. 마하트마 간디 역시 자주 『바가바드 기타』를 읽으면서 어떤 깊은 위안을 느꼈다고 합니다. 왜냐면 여기에는 작지만 연속적으로 명멸하는 성스러운 불꽃을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B: 말씀 감사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