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B: “겨레의 할아버지”, 함석헌의 시를 논한다는 것은 참으로 설레면서도 어려운 일입니다. 마음이 설레는 까닭은 작품 속에 강인한 목표 의식과 도덕성이 자리하기 때문이고, 시 해석이 어려운 까닭은 개인사와 한국 역사가 용해된 포괄적 해석을 요청하기 때문입니다.
A: 이해할만 하군요. 시작품 이해에 있어서 일단 함석헌의 삶과 사상을 일차적으로 이해하는 게 급선무일 것입니다. 함석헌의 삶을 깊이 파악하려면, 두 권의 책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치석의 『씨알, 함석헌 평전』(시대의 창, 2005) 그리고 김성수의 개정판 『함석헌 평전』(삼인 2011)이 바로 그 문헌입니다.
B: 한 번 참고하겠습니다. 함석헌의 삶은 일제 강점기와 분단 시대로 나누어집니다.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을 서술할 수는 없습니다. 함석헌은 두 시기에 열정적으로 그리고 연속적으로 비폭력 저항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어쩌면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운동과 비교하는 것도 좋은 일일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고백입니다만, 나에게는 1970년대에 『씨알의 소리』를 읽는 것은 고통스러운 즐거움이었습니다. 독자들을 위해서 함석헌 선생의 삶을 간략하게 말씀해주시지요?
A: 네, 190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서, 1920년부터 4년 동안 오산학교에 다녔습니다. 그곳의 교장은 다석 류영모 선생이었습니다.
B: 아 바로 이 시기에 다석과 조우했군요.
A:: 그렇습니다. 류영모는 사회적으로 활동한 분이 아니라, 평생 칩거하면서 종교 사상을 연구하였습니다. 그의 종교사상은 『다석 일지』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석헌은 오산학교에서 류영모 외에도 조만식, 이승훈, 안창호 등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B:: 그 이후에 함석헌은 자신의 친구, 김교신(金教臣)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고등사범학교에 다녔다고 하지요?
A:: 두 사람에게 기독교 사상을 가르친 사람은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였지요. 그는 무-교회주의자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내면으로 받아들이지만, 허례허식적인 예식을 거부했습니다. 또한 기독교 사제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았지요. 이 점에 있어서는 우치무라 간조의 입장은 류영모의 그것과 유사합니다. 교회는 기독교 부흥에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왜곡시켰다는 것입니다.
2.
B:: 사실 “비-교회주의”는 동양에서만 나타난 운동이 아니라, 서양에서도 활발하게 진척되었지요?
A: 그렇습니다. 유럽에서는 16세기 이후에 평신도 운동이 퍼졌습니다. 사제들은 권력과 결탁하여, 체제 옹호적 자세로 신도들을 단속하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B: 여기에도 종교와 정치의 상관성에 관한 문제가 숨어 있군요.
A: 그렇습니다. 기독교 사제들은 권력과 금력 이데올로기와 결탁하여 인민에게 도덕적 강령을 제시하고 이에 대해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마르틴 루터는 “만약 내면의 정신이 가르치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 Nemo audit verum nisi spiritu intus docente”라고 일갈했던 것입니다.
B: 종교 개혁이 어느 정도 정착되었지만, 그 이후에도 사람들은 교회라는 기관으로부터 등을 돌린 셈이로군요.
A: 네, 기독교는 사도 바울 이래로 하나의 단체 즉 교회의 활동을 포교의 수단으로 여겼습니다. 아니, 그것은 “선포κήρυγμα”를 위한 하나의 전제 조건으로 작용합니다. 이를테면 “한 사람의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Unus Christianus nullus Christianus”라는 전언을 생각해 보세요. 기독교는 반드시 믿음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단체를 구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몸 (M)을 교회 (W)가 싸안는 방식으로 전해지고 퍼져나가야 한다고 사람들은 믿었습니다.
B: 평신도들은 교회의 체제 밖에서 얼마든지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로군요.
A: 네 그렇기에 가난한 기독교들은 더 이상 권위적인 사제들의 체제 옹호주의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집에 혼자서 촛불을 피우고 기도드리며 성령이 자신의 마음속에 충만해지기를 갈구하곤 하였지요. 이러한 운동은 조아키노 다 피오레Joachim da Fiore의 “세 번째 제국”을 갈구하는 메시아주의에 접목되어, 오랜 세월 이어졌습니다. 보나벤투라, 에크하트트 선사의 신비주의는 여기서 태동하였습니다. 15세기에 “성령은 유비쿼터스, 즉 언제 어디서나 머물고 있다.”고 가르친 사람은 쿠자누스Cusanus였습니다.
B: “유비쿼터스ubiquitous”는 오늘날 인공지능 영역에서 사용되는 용어인데, 쿠자누스에게서 비롯되는군요.
A: 그렇습니다. 평신도 운동은 나중에 천년왕국설에 기반을 둔 메시아사상으로 이어졌을 뿐 아니라, 유럽에서 범신론 사상이 정착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비근한 예로 미국의 퀘이커 교도들의 종교적 삶 역시 유럽의 평신도 운동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19 한국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시 소개) 서로박: (3) 함석헌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 (0) | 2024.12.10 |
---|---|
(명시 소개) 서로박: (2) 함석헌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 (0) | 2024.12.10 |
(명시 소개) 전홍준의 '은사시나무' (0) | 2024.11.23 |
전홍준의 시, '장돌뱅이 서씨' (0) | 2024.11.01 |
최영철 시인의 문장들 (0) | 2024.10.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