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리는 지남철
민영규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우리는 그 바늘의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한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
해설에 갈음하는 다섯 가지 사족
1. 서여 (西餘) 민영규 (閔泳珪, 1915 - 2005)의 시인데, 신영복 선생이 서예로 남긴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신영복 선생의 마지막 저서 "담론"을 읽으면, 우리는 이 시를 다시 한 번 접할 수 있습니다. 민영규 선생은 동양사, 불교 그리고 강화의 민속학을 전공한 학자입니다. 민 교수님은 1976년에 연세대 출판부에서 "예루살렘 입성기"라는 책에서 이 시를 소개했습니다. (민영규: 예루살렘 입성기, 연세대 출판부 1976). 그렇지만 작품은 놀라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혹시 떨리는 지남철은 당신이 호기심을 지닌 채 우연히 발견하는 놀라운 대상이 아닌지요? 당신의 흐릿하게 비치지만 분명한 목표 의식을 지닌 젊은이들의 마음을 단단하게 다지게 하는 작품이라고 여겨집니다.
2. 멀리서 어떤 물체가 달려옵니다. 너무 멀어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500미터 접근하면 우리는 그게 어떤 동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무엇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시력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인식 능력은 유한하기 때문에 철학자들은 형이상학이라는 영역을 상정하였습니다. 300미터 접근하면, 그 물체는 소도 늑대도 아니고, 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00미터 접근하면, 그 말은 보통의 말이 아니라, 명마(名馬), 브룬넬루스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인식에 도달했을 때 지남철은 떨리지 않습니다. 정지하는 순간, 우리는 거의 완전 무결한 인식에 다다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만족할까요?
3. 13세기의 영국의 철학자, 프란체스코 수사이자 자연과학자였던 로저 베이컨Roger Bacon은 안경을 만들려고 자석을 관찰하였습니다. 이때 그는 금속 하나가 놀라울 정도로 떨리면서 자석에게 부착하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로저 베이컨은 이에 대해 전율하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자석이 무엇인지, 그게 어째서 인력, 즉 당기는 힘을 지니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베이컨의 눈에는 돌덩이 속에 마치 마력의 신이 깃들어 금속을 이리저리 움직이게 하는 것처럼 비쳤습니다. 그는 돌을 바로 마치 현자의 돌로 여겼던 것입니다. 돌에서 드러나는 떨림은 마치 신의 무의식적 개입처럼 느껴졌던 것이지요. (참고로 안경은 13세기 말에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4. 떨리는 지남철은 고대에서 이어져온 "코나투스 conatus" 개념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코나투스는 "열망 appetitus"의 의미를 지니는데, 이 용어는 오늘날 심리 철학의 영역에서 활용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고대 로마 시대부터 이어져온 개념입니다. 가령 코나투스는 물리학에서 움직이는 물체가 마지막 목표에 이르러 멈추려고 하는 순간 드러내는 관성의 떨림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코나투스 개념을 생명체의 오르가슴의 순간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암컷과 수컷은 짝짓기를 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오르가슴에 도달하기 직전에 격렬한 떨림을 만끽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블로흐는 생명체의 사랑이 "이별을 연습하는 격정적 트레몰로"라고 규정하기도 했습니다. 코나투스는 목표에 다가가기 전에 멈추려고 하는, 자시 말해서 정지 상태에 도달하기 전의 흔들림으로 정의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코나투스를 "스스로를 보존하기 위해서 멈추려고 애를 쓰는 물질의 보존 충동"으로 규정하기도 했습니다.
5. 나의 좌우명 가운데 하나는 "목표를 잡치는 게 가장 나쁜 것이다.Corruptio optimi pessima"입니다. 이 말을 처음으로 남긴 사람은 성자, 그레고리우스 마그누스였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작은 실수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이로써 순식간에 방향 감각을 상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나려면 자신의 고유한 목표를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목표는 마치 북극성처럼 하나의 분명한 방향을 가리킵니다. 마치 북두칠성이 북극성의 주위를 맴돌듯이, 우리의 목표는 한 방향에서 흐릿하게 유동합니다. 그것은 멀리 자리하므로, 흐릿하게 보이고 진동(振動)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인간은 미래의 삶을 확고하게 예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목표에 다가가면, 지남철의 떨림은 서서히 약화됩니다. 떨림이 사라지면, 우리는 새로운 목표를 설정해야 합니다.
6. 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Che Guevara는 1960년대 초에 쿠바에서 혁명을 완수했습니다. 그는 게일라 전술로 부패한 바티스타 정권을 타도하고, 미국의 영향으로부터 독립적인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던 것입니다. 체 게바라는 12 명의 친구 (12 제자?)들과 남미로 떠났습니다. 혁명은 멈춤이 아니라, 변화이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쿠바를 통치하는 일을 피델 카스트로에게 맡기고, 미련 없이 아바나를 떠났습니다. 혁명가는 혁명 이후의 삶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더 이상 혁명적 과업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백발백중의 명사수, 타냐라는 여성 동지에게 그가 일갈한 말은 "더 많은 베트남을!"이었으며, 이때 그의 가슴은 아드레날린의 흥분으로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지남철이 흔들리듯이, 생명의 맥박 역시 멈추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한 인간은 더 나은 무엇을 애타게 갈구합니다.
7. 오스트리아 출신의 언어철학자,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자신의 "트락타투스Tractatus"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 움베르토 에코는 "장미의 이름La nom de la rose"에서 비트겐슈타인을 떠올리면서 다음과 같이 일갈했습니다. "사다리를 타고 지붕에 올라간 사람은 사다리를 저버려야 한다." 여기서 언급되는 지남철 내지는 사다리는 학문적 예술적 노력에 활용되는 수단을 가리킵니다. 지남철이 떨리지 않으면, 우리는 더 이상 거기에 집착하지 말고, 미련없이 지남철을 저버려야 합니다. 사다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언가를 파악하기 위해서 사다리를 활용한 다음에 우리는 그것에 더 이상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면 하나의 깨달음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떤 더 큰 깨달음을 추구하라고 우리를 자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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