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Bloch 저술

박설호: (2) 블로흐와 루카치. 사상과 예술론의 차이점

필자 (匹子) 2024. 10. 1. 10:36

(앞엑서 계속됩니다.)

 

6. 루카치와 사회주의 리얼리즘: 나중에 소련 공산당은 루카치의 상기한 이론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면서, 시민 사회의 제반 예술 작품들이 리얼리즘에 위배한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가령 알렉산더 즈다노프는 이른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강조하였습니다. (Mittenzwei: 22). 이것은 차제에 마치 채플린의 영화에 묘사된 바 있는 “가방의 비유”처럼 잘못 활용되었고, 이로써 시민 사회의 예술 속에 부분적으로 은폐된 공산주의의 예술적 유산들은 거의 사장되고 말았습니다. 소련의 예술적 판관들은 즈다노프의 용어에 집착하면서, 시민 사회의 예술 작품들을 통째로 비난했습니다. 시민 사회의 예술은 비유컨대 몰락하는 부패한 계급의 늪지에 핀 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오펜바흐, 조이스, 카프카, 프루스트 등이 부패한 시민 사회의 예술가로 낙인찍히고 말았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한스 아이슬러는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물론 몰락이지요. 그러나 얼마나 찬란한 황혼을 보여주고 있나요!” (Bloch, Jan Robert: 96).

 

1930년 이후에 루카치는 두 가지 사항을 용인하기에 이릅니다. 첫째로 그가 설정한 리얼리즘이란 소련의 천박한 문화비평가들의 시금석과는 다른, 훨씬 수준 높은 무엇이었습니다. 몇몇 시민 사회에서 발표된 작품의 위대성은 루카치에 의하면 무산 계급의 인간애 내지는 당파성으로 수용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루카치는 리얼리즘의 보편적 기준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표현주의를 비판했을 뿐 아니라, 부분적으로 소련의 문화 정책에도 과감하게 이의를 제기하였습니다. 왜냐면 소련 문화 정책의 강령은 당파성을 오로지 당의 뜻으로 확정하고, 이에 무조건 동참하라고 강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루카치는 유연한 자세로 토마스만 그리고 발작 등과 같은 시민 사회의 리얼리즘 문학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였습니다. 진정한 리얼리즘은 작가의 고유한 정치적 예술적 입장과는 다른 차원에서 파악되어야 하며, 당파성과 전망이라는 관점에 의해서 엄밀하게 객관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7. 블로흐 사상에 대한 루카치의 비판 그리고 총체성: 수십 년 후에 간행된 『역사와 계급의식』의 수정판 서문에서 루카치는 젊은 시절의 사고에 관해 논평하였습니다. “이 책에 기술된 혁명적 실천에 관한 구상은 어떤 아주 격정적인 무엇을 획득한다. 여기서 말하는 격정적 무엇이란 결코 당시에 공산주의 좌파가 품었던 메시아적 유토피아주의를 지칭하는데, 이는 진정한 마르크스 사상과는 일치되지 않는 것이다.” (Lukács, GK: 20). 루카치의 이러한 발언은 은밀히 블로흐를 겨냥하는 것이었습니다. 루카치는 1962년 『소설의 이론』 재판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습니다. 즉 블로흐는 이른바 “좌파의 도덕”에다가 “우파의 인식론”을 혼합해놓았다는 것입니다. 블로흐는 마르크스주의자로 자처하면서도 과거 시민 사회의 존재론과 형이상학을 파기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Lukács, TR: 15f.).

 

여기서 루카치가 근본적으로 문제 삼은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째서 블로흐는 마르크스의 이론에 집중하지 않고, 이른바 지엽적인 아리스토텔레스, 헤겔 등의 전통적 철학에 관심을 기울이는가? 하는 물음말입니다. 마르크스 예술론의 확립을 위해서라도 연구 대상을 방만하게 펼쳐놓는 대신에, 핵심적으로 요약될 수 있는 총괄적인 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루카치는 자신의 고유한 카테고리로서의 총체성의 개념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루카치는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역사적 과정의 총체성이 결코 개개인의 입장 내지는 실존주의의 사고에서 탄생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마르크스는 오로지 고립화와 개인의 가상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을 뿐이다. 개인으로서의 인간과 그의 실제 행동은 특수하게 주어진 역사에 조건화되어 있는 사회적 현실적 토대에서 설명될 수 있다.” (Schaff: 11).

 

총체성은 고립된 개인의 주관적 사고를 지양하여, 진정한 객관성을 표방하는 이념입니다. 사실 루카치의 총체성은 고대 그리스의 이상에서 유래하는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이상적 현실상 속에는 다양한 이상의 요소가 세 가지 형태로 자리하고 있는데, 이는 폐쇄성, 완전성 그리고 일원성의 형태를 가리킵니다. 폐쇄성, 완전성, 일원성의 개념은 노예 계층이 배제된 그리스 시민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었다. 루카치의 총체성은 구체적 역사적 사실에서 도출한 개념이 아니라, 사변적 추론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Lukács, Ideal:: 306). 이로써 총체성은 “변증법적 방법의 출발점이자 목표”이고, “사상과 역사의 통일체로 파악되는 변증법적 과정의 계기”로서 고찰하는 관점을 획득하게 됩니다. (홍승용 1996, 282). 총체성은 루카치에 의하면 그 자체 주어진 사악한 현실과 대비될 수 있는, 하나의 객관적 특징을 지닌, 바람직한 보편적 현실상으로 규정될 수 있습니다. (Lukács, GK: 71, 94).

 

8.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적 위상, 두 사람의 견해 차이: 루카치는 현실 파악을 위한 철학적 방법론으로서 두 가지 사항을 제시합니다. 첫째로 현실의 총체성은 주어진 현실의 모순 속에서 간파될 수 있다고 합니다. 루카치는 작가에게 모든 직접적인 것을 중개하여 표현해내라고 요구하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현상과 본질의 카테고리를 작동시키는 과업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 현상과 본질의 모순 구조는 무엇보다도 계급 갈등이라는 시금석에 의해서 측정될 수 있다고 합니다. 둘째로 루카치는 총체성을 통해 밝혀내야 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생산 관계 속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물화 Verdinglichung”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칭하는 “물화”란 자본주의의 구도 하에서의 상품 생산 그리고 이를 규정하는 모든 사고와 행동 양상의 형태를 규정하는 개념입니다. 물화는 상품에 내재한 노동 가치의 상인데, 이로써 인간의 노동은 노동자, 노동자의 행위 그리고 상품으로부터 소외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루카치는 『역사와 계급의식』을 기술할 무렵 유토피아에 근거한 블로흐의 사상적 입장을 세 가지로 비판했습니다. 1. 블로흐는 학문 연구의 방법론으로서 마르크스의 사상 외에도 시민 사회에서 파생된 사고 내지는 방법론을 마구잡이로 도입하고 있다. 2. 블로흐는 역사와 계급의식을 마르크스주의 역사 이해의 기본 관점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총체성의 폐쇄적 특징을 집요하게 비판하고 있다. 3. 마르크스의 역사 이해 내지는 계급의 극복을 통한 평등사회의 이념은 철학적 존재론의 핵심적 사항인데, 블로흐는 역사의 개방성 내지는 역동성을 강조하며, 마르크스주의를 상대화 내지는 희석하고 있다. 이를테면 루카치는 토마스 뮌처에 관한 블로흐의 연구를 염두에 두며, 블로흐의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문제로 삼고 있다. “마르크스는 국민경제학의 측면에서 공산주의의 사고를 축소화시켰다.” (Bloch TM: 56). “마르크스는 생산력으로써, 생산 과정을 고려함으로써 그와 유사한 구성적 존재 (같은 범신론, 신비주의의 특성, 헤겔의 이념 그리고 쇼펜하우어의 의지 등)으로부터 원래의 소유권을 재탈환하고 있다.” (Bloch GdU2: 301). 여기서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적 위상에 관해서 블로흐와 루카치가 사로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9. 마르크스의 사상은 블로흐에 의하면 독창적인 것이 아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블로흐는 마르크스주의를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공산주의 사상으로 파악하지는 않았습니다. 인간의 오랜 역사 속에는 공산주의를 추구하는 믿음 내지는 사상들이 속출했는데, 이러한 의향은 다만 종교 내지는 신비주의 그리고 철학의 범주 속에서 착색되거나 은폐되었다는 것입니다. 가령 기독교는 블로흐에 의하면 사랑의 공산주의로 이해될 수 있으며, 수많은 범신론의 사상 속에는 유물론의 전 단계로서의 “물질 이론”의 근본적 요소가 도사리고 있다고 합니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사상적 촉수 가운데에서 무엇보다 경제학적 관점을 강조했을 뿐이라고 합니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갈망을 정치 경제학에 근거하여 고찰함으로써, 더 나은 사회를 지향하는, 공산주의에 관한 다양한 갈망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 셈이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마르크스는 국민경제학의 측면에서 공산주의의 사고를 축소하고 말았다.”는 블로흐의 발언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즉 마르크스는 인간 평등의 삶에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되는 경제적 사안에서 하나의 해결책을 찾았다고 말입니다.

 

10. 엄밀한 학문의 폐쇄주의냐, 아니면 갈망의 유연한 관련성이냐? 블로흐는 인간과 자연의 존재 속에 어떤 변모를 지향하는 촉수가 도사린다고 생각했습니다. 블로흐는 존재론적 관점에서 유토피아의 의향을 탐색하면서, 더 나은 사회의 가능성을 찾으려 했는데, 이러한 노력은 루카치의 눈에는 마르크스주의 정치 경제학 연구와 무관한 사고로 비쳤습니다. 이러한 오해는 두 가지로 해명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루카치의 경우 모든 것을 폐쇄적 학문 영역으로 구분하고 나누려는 아카데미즘의 방법론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가령 고대 스파르타쿠스의 폭동은 루카치에 의하면 19세기 중엽의 무산 계급의 혁명 운동과는 현격하게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대의 폭동과 19세기의 프롤레타리아 해방 운동은 블로흐에 의하면 지향점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나 루카치는 서로 다른 역사적 사실을 서로 관련시킨다는 것 자체가 비학문적이라고 평가합니다. 이러한 견해는 카우츠키의 책에서도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카우츠키는 토마스 뮌처의 농민혁명이 종교적으로 착색된 거사라는 이유로 혁명의 역사에서 배제하였습니다. 이로써 엄밀한 학문의 폐쇄주의는 학제적 관심사 내지는 갈망의 유연한 관련성을 처음부터 꺾어놓고 있습니다. (Kautsky: 124). 그렇기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즉 루카치는 블로흐의 “어두움”, “구성될 수 없는 질문” 그리고 “가까움의 비밀” 등의 알레고리를 어떤 유형의 사변이론으로 매도하며, 이를 마르크스의 사상과 다른 무엇으로 치부하였습니다. 둘째로 루카치가 블로흐에 대한 루카치의 비판적 자세 속에는 “더 나은 세계를 이룩하려는 지식인의 혁명적 성급함”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루카치는 학문의 상호 관련성보다는 정치적 실천의 가치를 중시했습니다. 눈앞의 세계가 화염으로 불타고 있는데, 세계의 비밀 내지는 유토피아적 관련성을 찾는 작업은 지엽적이고 한가롭다는 것이었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