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물질과 유토피아의 시스템을 설정하는 일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여기에 포함되는 사항이다.” (블로흐)
“자연 주체에 관한 논의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일탈한 사고로서 인간의 관점에서 벗어난다.” (루카치)
1. 인간과 자연: 에른스트 블로흐의 사상적 진수를 압축해놓은 문헌, 『흔적들 Spuren』에는 물질과 관계되는 에피소드가 실려 있습니다. “우주는 참으로 광활한데, 우리 앞에 위치한 성 피터 성당의 높이는 얼마나 볼품없이 가련한가요? 만약 지구가 할 말이 있다면서 리스본에서 모스크바까지 입을 쫙 벌리고, 비밀스럽게 몇 마디 근원의 말씀을 외친다면, 어떨까요? 이때 지방 문화를 애호하는 현명한 친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 따위 헛소리는 논의라고 말할 수 없지요, 아니, 아마 쓸데없는 말을 지껄일 테지요, 왜냐하면 지구는 칸트와 플라톤의 책을 한 번도 읽지 않았을 테니까.” (Bloch SP: 190).
여기서 “현명한 친구”는 블로흐의 동년배, 죄르지 루카치를 지칭합니다. 루카치는 인간, 사회 그리고 역사만을 자신의 학문적 대상으로 설정하였습니다. 자연 주체에 관한 셸링의 논의는 루카치에게는 하나의 허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블로흐는 루카치와는 다르게 사고했습니다. 인간이 세계와의 조우를 통해서 경향적으로 발전해 나가듯이, 자연 주체 역시 인간과의 조우를 통해서 잠재적으로 변화를 거듭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블로흐는 주체의 갈망 이론 그리고 물질에 관한 이론을 구명하기 위해서 두 권의 책을 집필하였습니다. 『희망의 원리』 그리고 『물질 이론의 문제점』이 그것들입니다. 전자가 주체의 경향성, “습득한 희망 docta spes”으로서의 유토피아를 다루고 있다면, 후자는 은폐된 잠재성으로서의 물질의 근원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2. 블로흐와 루카치, 사상과 예술론: 블로흐와 루카치는 1910년대에 사상적 동지로서 친구로서 함께 지냈습니다. 우리는 두 사람의 사상적 궤적을 천착함으로써 그들 세계관의 공통점 내지 입장 차이를 밝히려고 합니다. 이는 유토피아, 총체성 그리고 자연 주체에 관한 두 사람의 의견 대립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루카치가 인간과 사회에 초점을 맞추어 급변하는 시대적 변화에 상응하게 자신의 세계관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면, 블로흐는 자신의 유토피아의 이론을 연속적으로 견지하였습니다. 루카치는 일시적으로 유토피아의 개념을 형이상학적으로 환치된 총체성으로 파악했는데, 이는 역사와는 동떨어진 어떤 피안의 세계로서의 유토피아 개념과 일맥상통하고 있습니다. (박설호 1: 163). 이는 유토피아를 현실 변화의 직접적인 촉매로 이해하는 블로흐의 입장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루카치가 스스로를 변모시키면서, 세상을 변화시키려 하였다면, 블로흐는 사회 정치적 변화과정에 흔들리지 않은 채 자연과 인간에 관해 연속적으로 사고해나갔습니다. 물론 루카치와 블로흐의 철학적 미학적 견해들을 모조리 파악하여 서로 비교하는 작업은 한 편의 논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거의 반세기 이상 이어진 두 사람의 학문적 결실 또한 방대한 문헌으로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이를 분류하고 정리하는 것은 오랜 시간을 요하는 포괄적 작업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두 사상가에게 공통으로 드러나는 몇 가지 핵심 개념만은 최소한 제한적으로 다룰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상기한 이유로 인하여 본고는 유토피아, 총체성 그리고 자연주체로 요약되는 핵심 개념들을 다룸으로써 이와 관련된 두 철학자 사이의 몇 가지 입장 차이를 조심스럽게 비교하려고 합니다.
3. 유토피아에 관한 의견 대립: 블로흐와 루카치는 1912년경부터 상당 부분 공통되는 철학적 미학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루카치는 1918년 무렵부터 소련 공산주의의 사상과 예술에 사활을 걸었습니다. 물론 루카치의 사상은 조변석개한 게 아니라, 20년대 중엽까지 조금씩 변화를 거듭했습니다. (김경식, 369). 그런데 블로흐와의 의견 대립은 이미 1918년에 점화되었습니다. 루카치는 당시에 계급 갈등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게 시급하다고 여겼습니다. 이에 비해 블로흐는 자신의 사상적 핵심을 수미일관 유토피아의 촉수에서 발견하려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물질 이론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세계 내재적으로 작용하는 자연 주체에 대한 관심사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이로써 두 사람 사이의 소통은 1918년 이후에는 차단되었습니다.
루카치와 블로흐가 사상적으로 예술적으로 서로 등을 돌린 것은 무엇보다도 유토피아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에 기인합니다. 루카치는 『소설의 이론』에서 유토피아를 현존하는 현실과 직결되지 않는, 어떤 형이상학적 영역으로 환치된 개념이라고 해명한 바 있습니다. (Lukács TR, 101, 136). 그렇지만 유토피아의 개념은 루카치에게는 마르크스주의에 덧칠된, 어떤 형이상학적이고 비합리적인 윤활유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루카치가 유토피아를 19세기에 일회적으로 등장한 역사적 사고로 규정한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블로흐는 다음의 사항을 여러 번 강조했습니다. 즉 인류의 역사는 거시적 차원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만인의 갈망을 보여주는데, 이것이 유토피아의 사상적 흐름으로 요약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유토피아라는 역사철학적 진수 속에 포함되는 사상으로서, 그 자체 “새롭게 등장한 구체적 유토피아”라고 합니다.
그런데 구체적 유토피아는 객관적 현실적 가능성을 토대로 한 지평을 전제로 하여 “계획 Planung”과 접목되지만, 주체의 막연한 충동이라는 일방성만으로 성립될 수 없습니다. (Schmidt: 41ff). 왜냐면 마르크스주의는 찬란한 평등한 사회에 관한 인간의 꿈을 정치 경제학의 영역에서 구체화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루카치는 블로흐가 견지했던 공산주의의 갈망의 유토피아를 단호하게 학문 이전의 제반 사고체계라고 매도하였습니다. 유토피아는 19세기 유럽 역사에서 일회적으로 출현한 사고로서 오언, 생시몽 그리고 푸리에 등에서 드러난다는 것이었습니다.
4.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토피아 비판: 유토피아에 대한 루카치의 부정적 입장은 엥겔스의 논문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 향하는 사회주의의 발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Engels 1969 A, 177 – 228). 블로흐의 입장에서 고찰할 때 엥겔스가 말한 학문적 사회주의는 자유의 나라에 관한 만인의 갈망을 하나의 학문적인 틀로 차단한다는 점에서 비난당할 수 있습니다. 루카치는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노동자 계급이 사회적 이상을 실현하는 게 아니라, 오로지 새로운 사회의 근본 요인을 활성화하게 할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Lukács, GK: 195). 물론 시민 사회의 질서를 파괴하는 그룹은 루카치의 주장대로 일차적으로 노동자 계급이지만, 더 나은 세계에 관한 구상이라는 과업을 수행하는 그룹은 때로는 혁명적 좌파 지식인일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19세기에 추상적 유토피아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된 바 있는 이상은 하나의 구체적 실천을 위한 방안으로 직접적으로 대입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그것은 특정 시대에 나타난 사회적 개선을 위한 하나의 범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루카치는 엥겔스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는 학문으로 발전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블로흐의 견해에 의하면 하나의 철칙을 역사적 결정론으로 확정시키는 처사라고 합니다. (Krier: 306). 학문적 사회주의는 이들에 의하면 역사의 최종적 목표에 해당하는데, 이는 블로흐에 의하면 역사적 변화 내지 역사 철학에서의 개방성과 역동성에 어긋나는 선언이라고 합니다.
5. 표현주의 논쟁에서 나타난 의견 대립: 유토피아에 관한 블로흐의 견해는 초기 논문 「장신구의 산출 Die Erzeugung des Ornaments」(1916)에서 개진된 바 있습니다. 여기서 블로흐는 과거의 유물 속에서 어떤 찬란한 미래에 관한 유토피아의 암호가 숨어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Bloch TLU, 20 – 48). 중세든, 시민 사회든 간에 과거의 문화적 유산 속에는 미래 사회를 특징짓는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블로흐의 이러한 주장은 결국 1935년에 표현주의 논쟁에서 하나의 논거로 드러났습니다. 이 논쟁은 정치적으로는 히틀러에 대항하는 “인민 전선 Volksfront”의 결집을 목표로 한 것이었는데, 루카치의 고전주의적 입장은 표현주의의 그것과 대립하였습니다. 루카치는 표현주의 속에서 파시즘으로 낙인찍힌, 일견 사회민주주의와 유사한 예술적 이데올로기를 도출해내려고 했습니다. 그렇기에 표현주의가 파시즘과 접목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파악했던 것입니다 (Schmitt: 35).
물론 루카치의 견해에는 인민 전선의 혼탁한 합종연횡의 정치 전략을 비판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사상과 예술은 거대한 투쟁을 위해서는 하나로 결집해야 하는데, 표현주의 예술은 루카치의 시각에는 별반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으로 비쳤습니다. 그런데 표현주의 예술 작품 속에는 옳든 그르든 간에 다양한 정치적 예술적 특성이 뒤섞여 있습니다. 그 속에는 블로흐의 주장에 의하면 바람직한 미래의 어떤 범례를 암시한 예측된 상, 즉 선현 Vorschein이 은폐되어 있습니다. 주어진 현실을 반영하는 예술적 사조로서의 표현주의는 마치 불순물을 담은 원석과 같은데, 루카치는 부분적 요소에 해당하는 이러한 불순물만을 문제 삼아 비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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