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를 뒤지다 몇 년 전에 쓴 글을 발견했습니다. 이를 공유하면서 그리운 제자들을 한분한분씩 떠올립니다. Carpe diem! 오늘도 무언가를 배우고 즐기기를 바라면서. 서로박 샘 OTL
................
친애하는 C,
대학교에 입학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방학이로군요, C는 대학 생활과 수업에 관하여 서면으로 질문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 대학에서의 공부는 혼자 하는 것입니다. 대학은 고등학교처럼 지식을 마구 주입시키는 곳이 아닙니다. 나의 경우 교육의 내용과 교육의 수준은 학생들에 의해서 우선적으로 정해집니다. 다시 말하면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어떤 수준으로 그것을 다룰 것인가?’ 라는 문제를 대할 때, 나는 학생들의 관심사와 수준을 파악하려고 애씁니다. 그 후에 나는 수업 내용과 진도에 대한 계획을 세웁니다. C, 교수에게 다양한, 그리고 깊이 있는 학문을 배우려면, 우선 본인이 열심히 노력하여 다양한 관심사와 깊은 수준을 성취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교수라고 해서, 내가 어디 독문학 분야를 모조리 압니까? 만약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교수는 자극을 받아 더욱더 학문의 범위를 넓혀갈 것이며, 또한 이를 수업 시간에 심화시킬 것입니다.
무릇 교육 행위란 학생이 아는 사실과 모르는 사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어떻게 내가 공자 앞에서 문자를 쓰겠습니까? 아니면 소 앞에서 불경을 외우겠습니까? 만약 내가 C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을 강의한다면, C는 지루함을 느낄 것이요, 너무 어려운 내용을 다룬다면 C는 괴로움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니 나에게 커다란 기대감을 품지 마십시오. 교수는 막무가내로 무엇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훌륭한 교사는 많은 지식을 지닌 사람이라기보다는, 학생의 관심사와 수준을 정확히 파악하는 자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직 훌륭한 교사가 아니지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이를테면 나는 “C가 교수도 풀기 어려운 난 문제를 스스로 풀었습니다.”라고 거리낌 없이 말하며 기뻐하는 선생이 되고 싶습니다.
둘째, 대학생은 지성인입니다. 더욱 정확히 말하면 대학생들은 앞으로 사회에서 지성인으로 일하고 살아갈 사람들입니다. 지성인은 “행과 행 사이를 읽는 사람 inter + lectere”이라는 어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말과 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성인은 어떤 말과 글의 의도를 예리하게 파악할 뿐 아니라, 자신의 사용한 말과 글의 효과를 어느 정도 예측하는 사람입니다. 똑같은 말을 들을 때나 똑같은 글을 읽을 때에 듣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은 이를 주관적 일방성에 의해서 제각기 다양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렇듯이 입장을 바꾸어 C가 사용한 어떤 말과 글은 주관적 일방성에 의해 제각기 다양하게 전달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C, 겉으로 드러난 어떤 말이나 글 자체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어떤 말과 글의 ‘표현’을 가급적이면 어떤 말과 글의 ‘의도’와 구분해야 하니까요. 만약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렇다면 C는 누구를 더 훌륭한 사람이라고 판단하겠습니까? (물론 ‘훌륭하다’, ‘훌륭하지 않다’라는 판단은 구체적인 사회 내의 법, 관습 도덕에 의해 임의적으로 인위적으로 규정되는 것입니다.) “갑(甲)씨는 말씨가 거칠고 표현이 너무 지저분하지만, 행동은 자신의 말과 일치된다. 을(乙)씨의 말을 들으면 너무나 고상하고 훌륭하여 감복할 것 같지만, 그의 행동은 말과 일치되지 않는다.”
셋째, 대학생은 비판 의식을 지녀야 합니다. 모든 것을 순응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니라, 노예이지요. 그런데 비판이란 자신의 주관적이자 일방적인 판단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이 설령 객관적인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곡해되어 잘못된 효과를 남길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C가 무언가를 비판할 때에는 우선 자신의 비판이 공명정대한지를, 나의 비판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를 사전에 깊히 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이 끝나면, 과감한 실천이 필요하겠지요. 비판이란 너무 자주 행해져도 안되며, 너무 드물게 이행되어서도 곤란합니다. 만약 비판이 난무하게 되면, 사람들은 거기에 주눅이 들거나 식상하게 될 것이요, 이와는 반대로 비판이 전혀 없으면, 사람들은 타성이나 인습에 안주하게 될 테니까요.
비판에는 공적인 비판과 사적인 비판이 있습니다. 오늘 C에게 다만 사적인 비판을 언급해볼까 합니다. 나는 흔히 ‘사람을 대할 때는 공손하게, 사실을 지적할 때는 직언(直言)을 서슴치 말아야 한다’고 말하곤 합니다. 누구의 잘못이 있으면, 면전에서 공손하고 정직하게 무언가를 비판하십시오. 말이란 떠돌면 그 의미가 왜곡되지 않습니까? 면전에서 비판을 당하는 사람은 설명을 통해 오해를 풀거나, 잘못이 있다면 잘못을 시인하겠지요. 혹시 C는 자기 잘못을 시인하는 자를 만나기 힘들다고 여기고 있는지요? 그런데 잘못을 저질러놓고 이를 시인하지 않는 자는 대부분 소인배들입니다. 원래 인간이란 누구나 때로는 (본의 아니게) 잘못을 저지르는 법,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는 자는 오히려 위대하게 보입니다.
넷째,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 마십시오. 배우는 행위는 예술입니다. 배우려는 마음은 천심(天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C의 스승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구두닦이에게서는 구두 닦는 법을 배우고, 운전 기사에게서는 운전 기술, 하다 못해 서울의 지리를 배우면 됩니다. 배우려고 애를 쓰는 사람은 심리적으로 언제나 떳떳하며, 의연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배우려고 애를 쓰는 사람은 자신을 변모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배움을 포기한 사람은 항상 타인을 의식하게 됩니다.
배움을 포기한 사람은 타성에 젖게 되고, 자신의 명예를 의식하게 됩니다. 그는 항상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 전전긍긍하지요. 배움을 포기한 사람은 선의의 경쟁 상대자를 적으로 오인하고, 온갖 술수를 부립니다. 그러나 고인 물은 나중에는 반드시 썩습니다.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이지요. 제 아무리 대학을 졸업하더라도 노력하는 일을 멈추게 된다면, 그 사람은 이제 발전의 가능성을 잃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 사람은 삶에 있어서의 변화 내지는 움직임을 포기하였으므로, 존재 가치를 잃은 식물인간(植物人間)이나 다를 바 없으니까요.
여름이 지나고 있습니다.부디 시간을 유용하게 활용하기를 바랍니다.
'2 나의 잡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설호: (2) 동학 그리고 에코 페미니즘 (0) | 2024.09.26 |
---|---|
박설호: (1) 동학 그리고 에코페미니즘 (0) | 2024.09.26 |
서로박: "약한 자아의 사회?" 김누리 칼럼 유감 (0) | 2024.07.24 |
삶은 겸허한 자세로 노력하는 과정이다 (0) | 2024.07.16 |
서로박: 영어 사냥, 가자 플로리다 해안으로! (0) | 2024.07.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