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잡글

서로박: "약한 자아의 사회?" 김누리 칼럼 유감

필자 (匹子) 2024. 7. 24. 10:09

아래의 글은 한겨레 신문 2024724일 자 신문에 실린 김누리 교수의 칼럼, 약한 자아의 사회입니다. 문제는 현재의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김누리 교수의 시각과 관점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읽어보시고 김 교수님과 필자의 견해 차이를 파악해보시기 바랍니다. A와 B의 견해 차이를 골똘히 숙고하는 일 - 이는 우리의 관점을 더욱 첨예하게 벼리게 해줍니다. 검은 글씨체로 기술된 것은 김누리 교수의 문장이며, 푸른 글씨체로 표기된 것은 필자의 문장입니다.

 

요즘 한국 사회가 돌아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머릿속에 자주 떠오르는 말이다.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가장 큰 적은 잔혹한 독재자가 아니라 개인의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있는 약한 자아라고 했다. 한마디로, 자아가 약한 자들이 모인 공동체는 민주주의를 할 수 없다는 얘기다. 아도르노의 지적은 한국 민주주의가 오늘날 퇴행을 거듭하고 있는 원인을 정확하게 짚고 있다.

 

하나의 이론을 논의할 때는 그 이론의 배경이 되는 사회 현실적 맥락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아도르노는 권위주의 성격The Authoritarian Personality(1950)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권위주의는 자기중심적 사고가 침해당하고 병들었을 때 발생하는 성향이라고 합니다. 김누리 교수는 이 점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집필 배경은 제 2차 세계대전 직후의 미국 사회입니다. 아도르노는 주어진 관습, 도덕 그리고 법에 무의식적으로 의존하는 미국인들의 성향을 비판하기 위해서 이 글을 집필하였습니다.

 

먼저 지금 한창 떠들썩한 정치판을 둘러보자.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에선 대통령에 대한 충성 경쟁이 가관이다. 채 상병 사망 사건과 명품 백 수수 의혹에서 보듯, 대통령의 초법적 국정운영과 그의 부인의 빈번한 부패 스캔들이 이미 상당 정도 드러났음에도 이를 비판하고 바로잡겠다는 후보는 찾아볼 수 없다. 모두가 충성을 맹세하느라 바쁘다. 한동훈 후보가 그나마 대통령과 거리를 두는 듯한 행보를 보인다지만, 지난 총선 과정에서 그가 윤석열 대통령에게 보인 ‘폴더인사’의 기억을 국민은 잊을 수 없다. 사실상 여당의 모든 후보가 대통령의 ‘충복’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특정 정치가를 지지하는 기준은 언제 어디서든 그의 구체적인 정책 방향 그리고 실천 방안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국민의 힘 당원들은 이를 고려하지 않고, 심리적 호불호에 따라 특정인을 지지한다고 합니다. 우파들은 합리적 정책으로 토론을 벌이지 않습니다. 특히 보수 성향의 경상도인들의 경우 반대파가 그저 미워서 국민의 힘을 지지하는 것 같습니다. 더불어 민주당에 대한 그들의 반감ressentiment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이 경우는 자아 내지는 비판적 자의식이 미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국민의 힘의 선동 선전이라는 술책에 말려든 증오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야당은 다른가. 민주당의 대표 경선은 아마도 해방 이후 치러진 당 경선 중 가장 맥 빠진 선거일 것이다. 당을 완전히 장악한 이재명 대표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가 아예 들리지 않는다. 한때 군사독재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던 86세대는 당대표 후보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퇴락했다. 들리는 건 오로지 당대표에 대한 낯부끄러운 찬양과 충성 맹세뿐이다. 민주주의의 활력이 사라진 민주당에선 이제 역사상 최초로 90% 당대표가 탄생할 조짐이다.

 

야당에 대한 김누리 교수의 진단은 안이하고 가치 중립적입니다. 현재 한국 사회는 집에 비유하자면 화염에 휩싸이기 직전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굥석열의 독재 정권의 패악질은 날로 심해지고 있습니다. 경제는 힘들고, 많은 수의 자영업자가 문을 닫고 있습니다. 인구 10만명당 자살률은 23명이 넘습니다. 그런데 언론은 이를 제대로 다루지 않습니다. 검찰은 누구든 혐의가 있으면, 압수 수색하거나, 세무조사를 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남북한의 평화가 위협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굥석열을 권좌에서 끌어내어야 합니다. 이를 고려한다면, 양비론의 자세로 야당이 어떻고 여당이 어떻고 논하는 것 자체가 사치스럽게 느껴집니다.

 

여야를 막론하고 한국 정치는 수십년 전으로 퇴행한 것으로 보인다. 군사독재 시대에도 이렇게 권력자에게 비루하게 굴신하는 정치는 없었다. 어찌 이리도 정치인의 자아가 약해졌는가. 정치만이 아니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엘리트들 대다수가 ‘약한 자아’의 소유자이다. 의사들을 보라. 누가 보더라도 한국 의사들의 미성숙하고 오만한 태도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운데도 내부에서는 어떤 반성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관점에서 고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굥석열 정권은 모든 언론사를 감시하고 검열하거나, 같은 편으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밀월 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최근에 극우파, 이진숙이 방통위원장으로 내정되었습니다. 한겨레와 경향 역시 권력의 이러한 압박에 비켜 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진보 언론이 독자의 뜻을 무시하고, 오로지 기자의 관점에서 가치 중립적으로 처신해서야 되겠습니까

 

판사는 어떤가. 양승태 사법부가 저지른 사법농단이 만천하에 드러났지만 제대로 처벌을 받은 판사는 단 한 명도 없다. 게다가 양 전 대법원장의 47개 혐의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하는 사법부의 뻔뻔스러운 행태에 국민은 할 말을 잃은 지 오래다. 검사는 다른가. 김학의 사건을 비롯해 검사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온전히 죗값을 물은 적이 있는가. 최고 권력자와 그 경쟁자에 대한 검찰의 노골적인 편파 수사에 국민의 분노가 폭발 직전에 있는데도 검찰 내부는 너무도 조용하다.

 

현재 검찰은 굥석열의 충견들입니다. 검찰 내부의 동요는 최고 권력층의 질서가 허물어졌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게다가 모든 사람은 자신의 밥그릇을 걱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 자의 비극적 존재 구속성이지요. 그런데 자기 성찰 없는 현 정권의 무도한 억압과 폭력이 문제입니다. 왜 사람들이 검찰 독재의 폭거에 가만히 있겠습니까? 모두가 고초를 당하고 싶지 않아서 이지요.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하는 것은 "약한 자아"가 아니라, 당하는 자들의 저항 내지는 협동 정신의 결핍입니다.

 

나는 정말로 궁금하다.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정치인이든 의사든 판사든 검사든, 조직 내에서 벌어지는 불의한 행위에 대해 비판하고 나서는 자가 어찌 하나도 없을 수 있단 말인가. 양심적인 정치인, 의사, 판사, 검사가 왜 없겠냐만, 그들은 어찌하여 침묵만 지키고 있는가. 내 기억으로는 한국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라고 하는 이 그룹에서 조직의 범죄적 행위에 따르기를 거부한 인물은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을 폭로하고 법복을 벗은 이탄희 판사가 유일하다.

 

나 역시 이탄희의 정치적 행동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절실한 일은 현 정권을 무찌르기 위해서 싸워나가야 하는 일입니다. 지금은 멀리서 팔짱을 끼고 정치적 중립을 고수할 때가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풍전등화의 상황에 몰려 있으며, 경제는 나락의 상태로 빠져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해야 할 사항은 굥석열 정권에 대항하기 위해서 여당 국회의원을 설득하는 일이고, 민주당과 조국 혁신당이 힘을 합해서 투쟁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비록 말과 행동에서 실수를 저지르지만, 희생할 줄 알고 협동할 줄 아는 김민석 의원을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지금 현 시점은 이탄희보다는 정봉주와 같은 싸움꾼이 더욱 절실히 필요합니다.

 

한국의 엘리트 집단에 이리도 의인이 귀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들 대다수가 권위주의적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다. 권위주의적 성격이란 권력을 가진 자에게 철저히 굴종하고, 자신이 권력을 가지면 타자를 가혹하게 굴종시키는 성향의 인간을 말한다. 한국의 엘리트 대다수가 권위주의적 성격의 소유자다. 에리히 프롬은 권위주의적 성격을 ‘사디마조히스틱 캐릭터’라고 불렀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는 가학적(사디스틱)이고, 자기보다 힘센 사람에게는 피학적(마조히스틱)인 성향을 보인다는 뜻이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우리에게는 가만히 앉아서 권위주의를 가타부타 논할 시간이 없습니다. 석열이라는 코끼리가 도자기 전시관에서 날뛰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 시급한 조처를 취해야 합니다. 검찰은 더 이상 야당을 일방적으로 탄압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언론은 은근히 기득권과 보수주의 그리고 굥석열을 지지함으로써, 그가 대통령이 되도록 간접적으로 도와주었습니다. 이러한 언론은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검찰과 언론은 권력과 기득권 세력의 하수인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권위주의적 성격은 파시스트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파시스트는 거의 예외 없이 권위주의적 성격의 소유자이다. 이들은 권력을 숭배하고, 약자를 혐오한다. 한국 엘리트가 대부분 권위주의적 성격을 가졌다는 것은 한국 민주주의에 대단히 불길한 징조다. 한국 민주주의가 파시즘으로 퇴락할 위험을 내장하고 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말술을 마시는 대통령, 김건희의 국정 농단, 언론 방송 탄압, 부자들을 위한 경제 조세 정책, 미국과 일본에 의존하는 외교 정책 등에 의해서 서서히 파괴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평판을 가진 스웨덴의 민주주의 다양성연구소는 최근 한국 사회의 독재화를 경고했지만, 사실 그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한국 엘리트의 권위주의화이다. 독재화는 제도의 복원으로 회복이 가능하지만, 권위주의화는 인간의 변화를 통해서만 극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조직의 불의 앞에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강한 자아를 가진 자가 사라진 사회는 파시즘의 문턱에 서 있는 사회다.

 

거듭해서 말씀드리지만, 지금의 시점은 이러한 논의를 벌일 정도로 정치적 정황이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제발 부탁드리니, 모든 사태를 여당과 야당의 갈등으로 단정하고, 가치 중립적인 자세로 멀리서 객관적으로 관망하지 말아주세요. 지금 우리는 여당과 야당의 싸움을 수수방관할 게 아니라, 진실과 거짓의 싸움, 검찰과 인민의 싸움, 레거시 미디어와 뉴 미디아의 싸움을 예리하게 주시해야 할 것입니다, 국민은 서서히 신문과 방송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