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잡글

서로박: 영어 사냥, 가자 플로리다 해안으로!

필자 (匹子) 2024. 7. 9. 11:22

 

 

가자, 어서 가자, 동해안으로” (송창식의 고래 사냥)

 

1.

오늘 나는 대통령의 영어에 관한 발언을 생각합니다. 안 그래도 한반도에서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영어 때문에 광분하기 일보 직전에 처해 있는데, 그의 발언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이라서 너무도 안쓰럽습니다. 강대국의 경제 논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를 그러한 식으로 편협하게 몰아붙일까요? 언제까지 우리는 강대국의 언어와 문화를 무조건 배워야 하고, 약소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무조건 배척해야 하는가요? 어느 베트남 신부는 의사소통의 어려움에 시달리다가 결국 자살로 삶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는 몇 년 전에 영어를 모르는 자와는 대화를 나눌 수 없다고 믿으면서, 북한과 이란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습니다.

 

차라리 베트남 신부더러 한국어를 배우라고 말하는 대신에, 그미의 남편 그리고 주위 한국 사람들이 베트남어를 배우고, 베트남의 따뜻한 문화를 이해하고 이를 수용하려고 마음먹었다면, 어떠했을까요? 아니면 그미의 자살에는 어떤 또 다른 이유가 숨어 있었을까요? 조지 부시가 겸허한 자세로 알래스카에 살고 있는 에스키모의 언어를 배우고, 애정 어린 시각으로 인디언 문화를 고찰하리라는 것은 변방에서 살고 있는 동양인 한 사람의 소박한 발상일까요?

 

2.

태고 시절 사람들은 바벨탑을 쌓아올렸습니다. 생전에 천국으로 발을 디딜 수 없지만, 그래도 높은 탑을 쌓으면, 인간은 최소한 천국의 찬란한 모습을 바라볼 수 있으리라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완전무결한 인식을 얻으려는 욕망 - 이게 화근이라면 화근이었습니다. 신은 무력으로 바벨탑을 무너뜨림으로써 인간의 오만한 욕망을 꺾어놓았습니다. 그 다음에 신은 인간에게 내린 바벨탑 붕괴보다 더 끔찍한 형벌을 내렸습니다. 다름 아니라 지상에 살고 있는 모든 민족들이 제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게 하는 게 그 형벌이었습니다. 서로 소통하지 말고 따로 살아라...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완전무결한 의사소통은 불가능합니다. 수많은 언어들이 이를 방해합니다. 게다가 사람들은 살아가는 공간도 다르고, 시대도 다르기 때문에 제마다 다른 견해를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언어 구사를 통하여 서로 간에 어떤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엄밀한 의미에서의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의사소통은 결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김광규 시인은 “언어는 불충족한 소리의 옷”이라고 말했지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도 그러할 진대, 하물며 외국인과 외국인 사이의 의사소통은 얼마나 힘이 들까요? 일상적 삶에 있어서의 의사소통은 가능하지만, 학문적으로 세밀한 문제에 관해서 외국어로써 소통하기란 무척 힘이 드는 법입니다. 누군가 에스페란토 어를 만들어 만국공통어를 제정했지만, 이 역시 마치 바벨탑 쌓는 일처럼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3.

사람들은 적절한 의사소통을 위해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언어를 찾습니다. 현재의 상황에서는 영어가 가장 적절한 것처럼 보입니다. 영어를 구사하면, 마치 지구촌에 사는 사람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고, 완벽하게 의사소통을 할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이는 허구입니다. 외국어 능력은 일상적 삶에 있어서의 사상 감정의 교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외국에서 오래 공부하신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학문적 토론 그리고 깊이 있는 연구를 위해 언어를 마스터한다는 것은 외국어 수업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특히 학문 영역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정확한 지식을 숙지하는 일이며, 이러한 지식으로 파생되는 여러 견해들을 엄밀하게 구분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학문 행위에서 요구되는 것은 외국어 능력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모국어의 능력입니다. 이러한 모국어의 능력은 차제에 깊은 사고의 능력 그리고 비판력과 창의력을 함양하게 해주지요. 학문 행위에 있어서 독서의 양과 이와 병행하는 사색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우리가 오로지 실용적 차원에서 경제 교류를 활성화하기 위해서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무역수지를 고려해 봅시다. 경제 교류에 있어서 우리에게 필요한 외국어는 영어가 아니라, 중국어, 일본어 동남아 언어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 국가와의 교역량 (23 %)은 미국과의 교역량 (7%)의 서너 배를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경제 교류만을 위해서 영어가 가장 중요하다는 주장은 틀린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영어만을 중시하고, 독일어, 프랑스어, 에스파냐어, 러시아어 등과 같은 유럽의 언어라든가 베트남어, 인도어 그리고 중동의 여러 언어들을 외면한다면, 나중에 반드시 문화적 편식 현상으로 인한 부작용이 나타나서 후세 사람들을 괴롭힐 것입니다.

 

4.

어쩌면 고등 교육을 전제로 한다면 언어 능력보다 더 중요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문 사회과학에서는 판단력, 분석력 그리고 창의력이며, 자연과학에서는 기초 자연과학의 능력입니다. 사실 실리콘 벨리에서 유능한 인재로 발탁되는 분들 가운데에는 다양한 외국어 실력을 갖춘 사람들도 있지만, 수학, 물리, 화학 등과 이러한 과목의 응용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말 잘하는 앵무새를 하나의 탁월한 능력으로 간주하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누구든 간에 해당 외국의 지역에서 20년 혹은 30년 살면, 그 나라의 언어를 잘 구사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외국어 실력을 자랑하는 일 자체가 스스로 자랑할 게 없는 바보들의 어리석은 행동인 것 같이 느껴집니다. 게다가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성 교육이 아닙니까? 세상은 여전히 참되게 봉사하며 살아가는 일꾼 대신에, 유능한 일꾼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하는군요.

 

다시 논의를 계속해 보겠습니다. 외국어를 탁월하게 구사하는 전문가들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남한의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가령 우리는 외국인과 한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서 동시통역의 놀라운 능력을 발견하곤 합니다. 동시통역은 어린 시절부터 특수한 환경에서 두 개의 모국어를 배운 사람들의 몫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사람들 그리고 어학의 재능을 지닌 사람들은 나중에 소수의 외국어 전문가로서 이름을 떨치게 되겠지요. 그러니 남한의 오천만의 인구 모두가 외국어, 그것도 영어에 혈안이 되어서, 미친 듯이 배울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5.

나의 체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외국어를 배우려면, 기초를 탄탄하게 습득한 연후에 그곳의 나라에 가서 생활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곳 나라에서 깨어있는 동안에 듣고 읽고 쓰고 말하는 네 가지 사항을 연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외국어를 어느 정도 마스터하는 데 있어서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곳 출신의 외국인들과 24시간 함께 지내며, 그에게 외국어를 배우는 일입니다. 어느 은행은 한 사원의 일본어 실력을 배양하게 하기 위해서 6개월 동안 일본인과 함께 거주하며 그에게 세밀하게 교육받게 합니다. 내가 듣기로는 정주영의 아드님 한 분이 그런 식으로 특수 교육을 받았다고 합니다. 현재 그분의 영어, 독어 실력은 정평이 나 있지요. 그렇지만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일대일 개인지도를 받을 특혜가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플로리다의 석양빛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평범한 부모를 둔 민초들로서는 어떻게 하든 미국으로 건너갈 수밖에 별반 다른 방도가 있겠습니까?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로 가는 것도 좋지만, 미국 플로리다 본토에 직통으로 상륙하는 게 상책이 아닐까요? 어쩌면 대통령이 나서야 할지 모르지요. 한반도 운하건설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사업보다는, 차라리 오천만 남한 사람들로 하여금 수만 척의 배에 나누어 태워서, 플로리다로 향하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게 당신이 바라는 영어 구사의 지름길일 테니까 말입니다. 한인들이 플로리다 해안에 도착하기 전에 상어 밥이 되든가, 허리케인의 노여움으로 익사하든가 하는 일은 보트피플에게는 그저 부차적인 일이겠지요. 오, 통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