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시형의 경물(敬物)은 인류세의 시대에 노아의 후손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주 내지는 비상 보트에 승선할 수 있는 마음가짐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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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올은 동양학의 걸물이다.” (김경재): 젊은 시절 도올 김용옥의 『여자란 무엇인가』를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제목 자체가 처음에는 나를 불쾌하게 했습니다. “여자란 누구인가?”라고 묻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원래 “무엇”이란 사물, 객체 그리고 대상을 지칭하므로, 여자를 그런 식으로 규정하는 게 기분 나빴습니다. 그렇지만 책에는 여성 혐오와는 정반대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여성의 문제는 하느님에 대한 따님의 인권을 회복하는 문제다.” 이 말은 열사람의 영웅, 일남구녀(一男九女)에 대한 기대감을 명시적으로 표현하는 명언이지 않습니까? (김춘성: 해월 사상의 현대적 의의, 실린 곳: 해월 최시형과 동학사상, 예문서원 1999, 61쪽.)
그때부터 필자는 도올 김용옥을 학문적으로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그의 책, 『절차탁마 대기만성』,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씩 독파하기 시작했습니다. 동양학을 대하는 도올의 시각은 깊고도 호방합니다. 문제는 그가 공자, 맹자, 노자, 장자 등과 같은 중국 철학을 깊이 그리고 폭넓게 다룬 다음에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동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동양학의 수많은 우회로를 거쳐서 수십 년의 내공을 쌓은 다음에 동학이라는 연구 영역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2. “요약문Exposé이 필요하다.”: 뒤늦게 김용옥의 『동경대전』 두 권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필자는 동양과 서양의 사상을 거침없이 논하는 김용옥의 호연지기에 한편으로는 경의를 표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필요한 내용을 모조리 담으려고 하는 허장성세에 무조건 동의할 수는 없었습니다. 자고로 동학의 핵심을 추적하려면, 동양학에서 지금까지 논의된 부차적인 사상을 일차적으로 논외로 삼아야 하는데, 김용옥은 모든 것을 거대한 그릇 하나 속에 집결시키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가령 서언(序言)도 유장하고 화사첨족(畫蛇添足)이 너무 많습니다. 제2권에 기술된 자료 번역은 차치하고라도 김용옥은 동학의 핵심을 바로 지적하지 않고, 학문적 종교적 논의 사항들을 너무 방만하게 원용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수운 최제우 역시 유불도 그리고 서양의 기독교에서 동학의 중요한 사상적 모티프를 부분적으로 채택하였으며, 이를 자신의 철학적 종교적 자양으로 활용했기 때문입니다.
3. 동학사상은 단군왕검의 “한 사상”에서 유래한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동학은 역사에서 일회적으로 등장한 세계관이 아닙니다. 그것은 고조선 시대부터 이어져 온 신선(神仙) 사상을 반영하는데, 이는 “자그마한 생각은 커다란 생각으로 수렴된다.”라는 협동성과 통일성의 사상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사고는 동경대전의 탄도유심급(嘆道儒心急)이라고 하는 대목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앞날의 모든 일은 하나의 이치로 돌아가 같아질 것이므로, 다른 사람은 조그마한 허물을 내 마음속에서 시비하지 않고, 내 마음의 적은 지혜나마 타인에게 베풀어주라. (来頭白事 同帰一理 他人細過 勿論我心 我心小慧 以施於人)”
그런데 김용옥은 “민본(民本)”을 가장 중요한 사상적 모티프로 채택하면서 유불선의 가르침을 자신의 논의에 과감하게 도입하고 있습니다. 수운 최제우는 기독교 신앙에서 동양에서 소홀히 해온, 전지전능한 인격 신의 특징을 도출해내었으며, 동양의 전통적 사상에서 인간이 지녀야 하는 에너지로서의 영묘한 “기(気)”를 동시에 고려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신 그리고 자연 (Spinoza), 존재자 그리고 존재 자체 (Heidegger), 신 그리고 창조성 (Whitehead), 존재 그리고 초월의 존재 (Tillich) 등은 수운에게는 이원론이 아니라, 서로 아우르는 관계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김상일: 수운과 화이트헤드, 지식산업사 2001, 77쪽 이하.) 이러한 관계는 태극의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수운 최제우는 오래전에 한민족에게 종교적 정치적 영향을 끼쳤던 현묘한 선도(仙道)에서 하늘(天)을 발견하였습니다. (김정설: 풍류 정신, 영남대학교 출판부 2009, 제 2부 참고하라.) “하늘”의 존재는 지금까지 하늘님, 혹은 하나님 (기독교), 하날님 (이세권), 한울님 (천도교), 한얼 (대종교), 하는님 (윤노빈) 등으로 표기되었습니다. 어쨌든 수운은 유교의 일부를 저버렸고, 불교의 가르침에서 부차적인 것들을 일탈시켰으며, 도교에서 많은 부분을 무속으로 제외했던 것입니다. 이는 한민족의 특징, 이를테면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제세이화(在世理化)의 정신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여겨집니다. 해월 최시형은 한민족의 원조가 무당 풍속이라는 주장에 대해 호통을 치면서 개탄했다고 합니다. 특히 그가 무속의 전통을 철저하게 혐오한 이유는 그것이 하늘과 인간 그리고 지상의 생명체가 추구해야 하는 정신을 흐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4. 민본 사상은 맹자에게서 엿보이지만, 동학의 민본 정신은 고대의 단군 사상에서 유래한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의 논쟁을 불러일으킬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도올 김용옥은 민본 사상의 근원을 무엇보다도 맹자에게서 발견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맹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늘은 우리 백성이 보는 것으로부터 보며, 하늘은 우리 백성이 듣는 것으로부터 청취할 뿐이다. (天視自我民視 天聴自我民聴)” 여기서 김용옥은 민본 (플레타르키아)의 근본적 의미를 발견하고 있습니다. (동경대전 I, 279쪽)
부언하건대 동학의 사상적 역사는 -김범부도 지적한 바 있지만- 한민족의 전통에서 발원하여 이어져 내려온다는 점에서 단군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최치원의 “풍류도(風流徒)”라든가 신채호의 “선교(仙教)” 등의 개념은 고대의 선 사상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동학의 근원을 중국 철학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고대의 선층(仙層)에서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맹자 역시 도교의 전통에 뒤섞인 신선(神仙)이라는 맥락에서 민본을 도출해낸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중국의 유교적 전통을 다만 부분적으로 참고해야 할까, 아니면 동학 운동의 근원적 줄기로 삼아야 할까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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