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전홍준 시인은 2020년 말에 시선집 『흔적』을 간행했습니다.
너: 그는 “간결하고 투박한 문체로 작품을 창조하는 고향 시인”입니다. 시편들은 홍준 시인의 활달한 성격과 정교한 투시력이 결합된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홍준 시인은 언어로 조작하는 수많은 시인들의 경우와는 달리 압축을 선호하고 단어 하나하나가 정확하게 핵심을 찌르고 있습니다.
나: 그렇지만 시적 주제가 독자에게 수월하게 전달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요?
너: 홍준 시인은 단어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시적 유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심하게 정독해야 합니다.
나: 몇몇 사람들은 이러한 유형의 시 대신에 수사와 수식으로 수놓은 작위적인 시를 선호합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전홍준의 시적 가치가 지금까지 제대로 수용되지 않았는데, 이는 매우 아쉬운 대목입니다.
너: 그렇습니다. 홍준 시인의 시는 아프고, 쓰라리며, 애달픈 마음의 체를 통해서 걸러진 누룩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의 시를 투박하다고 표현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그의 시집에 실린 시 「아요」를 살펴볼까 합니다.
“서부 경남 어스름 골목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부탁하는 말인데 비굴하지 않고
인절미 같이 쫄깃쫄깃한
가뭄에 사생결단, 물꼬싸움을 하다가도
이 한마디에 서로의 상처에 연고를 발라주고
흙 묻은 옷을 털어주기도 하는
새벽녘, 음기탱천한 지아비가 잠에 취한
지어미를 은근히 부르면
스르르 치마말기도 풀어지는
아요
아요, 몇 번 부르고 나면
대책 없이 그대가 좋아져
심장비밀번호까지 공유하고 싶은 말
아요!” (전홍준: 흔적, 전망 2020, 36쪽 이하)
나: 인간을 괴롭히는 네 가지 심리적 하자는 분노 (광기), 고독 (우울), 미움 (질투) 그리고 불안 (강박)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동인은 바로 사랑일 수 있습니다. (박설호: 호모 아만스. 치유를 위한 문학 사회심리학, 울력 2017, 24쪽 이하)
너: 인간 개개인은 개별적으로 나누어진 사람들이지만, 인간의 영혼은 사랑이라는 매개체로 서로 뒤엉켜 있다는 말씀이로군요.
나: 그렇습니다. 사랑과 우정을 생각해 보세요. 서로 사랑하고 애호하는 사람들은 비록 헤어져 있지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사랑과 관심이라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져 있으며, 바로 이러한 연결고리가 있기 때문에 고독하고, 지루한, 힘들고 가슴 아프게 하는 삶의 구렁텅이 속에서 위안을 얻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너: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사랑 그리고 연민의 감정이야 말로 더불어 사는 사회적 삶에서 가장 소중하고 의미 있는 정서라는 말씀이로군요.
나. 무릇 사랑은 한 인간이 인간적 따뜻함을 찾으려는 욕구에서 싹트기 시작합니다. 이때 우리는 “아요”하고 말을 걸곤 합니다. 수도권에서는 “저기요.”라고 말하지만, 남도에서는 “아요”하고 말합니다. 수도권에서는 타인이 “저쪽” 내지 “그쪽”으로 표현이지만, 서부 경남에서는 타인이 “이쪽”에 해당하는 “아요”입니다.
너: “아요”는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상대방의 동의를 구할 때, 상대방의 이해를 촉구할 때, 상대방에게 말을 걸 때, 상대방의 관심을 부추길 때,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원하거나 부탁할 때 사용되는 말이 “아요”입니다.
나: 시인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부탁할 때, “아요”를 사용하지만, "비굴"한 표현은 아니라고 장담합니다. 왜냐하면 “아요”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요구하는 표현이 아니라, 처음부터 어떤 상호적이고 호혜적인 의향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가령 네가 나에게 잘해주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상으로 어떤 대가를 제공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아요”라는 표현 속에는 아무런 대가 없이, 아무런 “대가 없이” 잘 해주겠다는 마음가짐이 담겨 있습니다.
너: 조건 없는 사랑과 우정이 바로 그것인가요?
나: 그렇다고 해서 아요가 “아가페ἀγάπη”와 같은 무조건적인 이타주의를 지향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요 속에는 끈끈한 정을 서로 주고받자는 자연스러운 마음가짐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너: “아요”가 끈끈한 정을 담는다는 점에서 시인이 “인절미 같이 쫄깃쫄깃”하다고 표현했군요.
나: “아요”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과 반목에 치유의 “연고를 발라주는” 표현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요”하고 부름으로써 “흙 묻은 옷을 털어주며” 서로 화해할 수 있습니다.
너: 아요는 지아비와 지어미 사이에서 사랑을 찾는 조용한 보챔의 말일 수 있습니다. 시인이 4연에서 서술하는 것은 결코 선남선녀의 끓어오르는 사랑의 욕망과는 다르지 않나요?. 만일 지어미가 음기탱천하고, 지아비에게 양기가 가득 차 있다면, 이는 신혼부부의 경우일 텐데요.
나: 그렇습니다. 제 4연에 등장하는 남녀는 노년에 이른 부부입니다. 지아비는 지어미를 사랑하고 싶지만, “음기탱천”한 그의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를 잘 이해하는 지어미는 애처로운 마음으로 남편을 위해서 살며시 치마끈을 풉니다. 여기서 우리는 상대방에 대한 애틋한 배려를 읽을 수 있습니다. 아요는 대책 없이 사람을 좋아하게 만드는 표현, “심장비밀번호”까지 다 내주고 싶은 표현입니다.
너: “아요”는 개별적 존재로 따로따로 고립되어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서로 소외된 인간 사이에 하나의 가교를 형성해주는 사랑과 우정의 출발점이 되는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 마지막으로 시인에게 한 마디 전할 말씀이 있나요?
너: 네, 아요는 서부 경남 지역에만 통용되는 표현이 아니라, 한 반도 나아가 만주 지방까지 통용되는 표현이었으면 좋겠어요. 지금까지 서부 경남 뿐 아니라,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평안도, 함경도 그리고 만주 지역 한인들 대부분은 천성적으로 정이 많고, 평화를 사랑하며, 상대방을 헤아리고 “대책 없”는 사랑과 우정을 베풀려는 마음가짐을 품고 있습니다.
나: 물론 이들 가운데에는 눈앞의 이익 때문에 부모를 배반하고, 친구의 등에 칼을 꽂는 사람들도 있지요.
너: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백의민족, 동이족 사람들은 이를테면 가족과 이웃의 안녕을 도모하려는 애틋한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습니다. 폭력을 싫어하는 홍준 시인의 명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이라고 여겨집니다.
실린 곳: 포엠포엠, 통권 91, 2021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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