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독일의 화가, 프란츠 마르크 (Franz Marc)는 언젠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림 그리는 일은 다른 공간에서 다시 태어나는 행위이다.” 마르크에 의하면 또 다른, 가능한 공간에 대한 열망이 결국 화가로 하여금 붓을 들게 만든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은 어째서 이정주의 시를 읽을 때마다 떠오르는 것일까? 가장 훌륭한 공간에서 머물면서 지고의 행복을 느끼려는 욕구야 말로 시인으로 하여금 창작에 몰두하게 하는 것일까?
2.
흔히 사람들은 이정주의 시가 초현실주의적 실험 정신을 연상시킨다고 말한다. 이는 틀리지 않지만, 그 자체 충분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정주의 시 속에는 과거의 특정한 정신 사조와 비교할 수 없는, 어떤 독특함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독특함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즉 이정주의 시는 현재 주어진 상황을 단순히 모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시편 속에는 자신의 다양한 과거 체험이 마치 모자이크 속의 무늬처럼 촘촘히 박혀 있다. 시적 관점의 변화 역시 과감하게 시도된다. 삶과 죽음의 상황은 작품 속에서 뒤바뀌기도 한다. 이를테면 「외출」은 나무로 환생한 (?) 인간의 삶을 다루고 있으며, 「행복한 그림자」는 죽음을 넘나드는 장자 莊子의 시각을 연상시킨다.
현재 직면한 사건은 시인의 의식 속에서 과거의 경험과 기묘하게 조우한다. 이러한 조우는 어떤 연상 기법에 의해서 서술된다. 이로써 이정주의 시는 서로 어긋나게 대칭을 이루며 기막힌 조화로움 혹은 부조화를 보여준다. 문제는 두 개 혹은 다양한 현실적 체험이 충돌할 때 느끼는 모든 사고 내지 감정이 이정주의 시에서는 단편적으로, 간헐적으로 표현된다는 점에 있다. 그것은 어쩌면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인지 모른다. 즉 이정주가 겪었던 시인으로서의 제반 체험은 밝고 찬란한 것이 아니리라고 말이다. 오히려 그것은 분명히 고통과 좌절, 불행과 아픔 등에 관한 기억일지 모른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그의 시적 언어는 문맥 속에서 짧고도 급박한 표현으로 차단될 수밖에 없다. 생각해 보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과거의 아픈 기억을 무의식적으로 잊으려고 애쓰지 않는가?
3.
이정주의 시세계를 “기억과 갈망의 몽타주”로 표현하는 것은 어떨까? 왜냐하면 고통스러운 기억들은 서로 교차되면서, 시인이 갈망하는 무엇에 관한 어떤 편린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를 위하여 때로는 가령 완전히 낯선 상황 내지 기상천외한 관점을 과감하게 도입하기도 한다. 이는 「물 찬 베드로」 「무익한 종」과 같은, 종교 시편에서 드러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포도밭을 지나실 때」를 예로 들어보자.
“너희들 그토록 좋으냐. 내게 오너라. 저 밖에서 흘러 다닌다는 그리움과 낮은 곳을 기어다니는 부끄러움에 물꼬를 터주리라. 포도가 지면 모든 게 끝나지 않느냐? 대답할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가슴을 열어 단단히 박힌 시멘트 기둥을 뽑고 몇 광주리 신 포도와 농 묻은 팬티를 집어내면 단단히 부은 너희들의 울음통이 보일게다. 더 이야기하지 않으마. 너희들 서로 그토록 좋으냐. 가슴 답답해도 아니꼬워도 참을 수 있겠느냐. 그러면 오너라. 오줌통과 오줌통을 내 이어주지. 평일날 오후쯤 오너라.” (전문)
시적 화자는 전지적 (全知的) 관점에서 인간의 모든 비밀들을 예리하게 꿰뚫고 있다. 필자는 관습 속에서 뒤틀린 사랑을 이처럼 신 (神)의 입을 빌어서 발설한 경우를 아직 접하지 못했다. 생각해 보라. 사랑과 성은 남한에서는 오로지 결혼이라는 굴레 속에서만 허용되고 있다. 축복받지 못하는 연인들은 이른바 “간통”이라는 범죄로 처벌당할 위험에 빠져 있다.
그렇기에 “사랑 없는 결혼 생활을 영위하는 게 오히려 더욱 부도덕하다.”라는 마르크스 Marx의 말은 남한에서는 낯선 주장으로 울려 퍼질 뿐이다. 결혼할 수 없는 처지의 연인들은 비밀리에 사랑을 나눌 수밖에 없고, 그 때문에 틀에 얽매인 채 살아가는 사람들은 질투심과 관음증으로 무장할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하여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몇 광주리 신 포도와 농 묻은 팬티를 집어내면 단단히 부은 너희들의 울음통이 보일게다.” 그렇다면 그리움과 부끄러움에 “물꼬를 터줄” 방안은 과연 무엇일까?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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