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안 오는 새벽
고병희가 부르는 아씨에게
빨려든다
남편이란 나침반을 잃은
늙은 여인이
고독에게 치명상을 입고
바라보는 노을
눈시울 적시는 덧없는 날들
먹물처럼 번져오는
죽음의 그림자
압축파일에 보관된
뒤죽박죽, 생
서산으로 넘어가는 노을에
갈무리하기 좋은 나이
전홍준의 시 '일흔'
말년의 고독에 관해서 기술한 소설은 거의 없습니다. 기쁨과 오르가슴이 사라진 시간을 공유하고 싶지 않아서겠지요. 하지만 이 역시 인생의 일부이기 때문에 발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모이라 여신은 모든 생명체를 저세상으로 데리고 갑니다. 시간의 무심한 화살촉은 그미의 손처럼 여겨집니다. 새벽에 일어나 거울을 쳐다보니, 그렇게 멋지게 보였던 청춘의 얼굴은 어느새 누런 메줏덩어리로 뒤엉켜 있습니다.
머리통은 백발, 아랫도리에는 하얀 거웃 - 늙음의 흔적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군요. 태어난 지 엊그제 같은데, 이룬 것은 거의 없고, 해는 서서히 서산으로 지려고 합니다. 부지불식 간에 망각 속으로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습니다.
오리 한 마리는 하늘을 날다가, 심장이 멎어서 툭 떨어져 죽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그것을 몹시 안타까워했는데, 이제는 돌연사가 오히려 생의 마지막 축복으로 여겨지는군요. 건강하게 살면 더없이 좋겠지만, 병마가 찾아와 오랫동안 요양원에서 목숨을 연명하는 삶은 슬픈 외로움일 것 같습니다. 혼자서 식사도 못하고,스스로 목욕할 수 없어서 요양 보호사에게 몸가락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 자체가 참을 수 없는 수치일 테니까요.
향후 10년만 건강하게 살자고 다짐해봅니다. 병마로 시달릴 경우에는 스위스 병원으로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곳에서 안락사 εὐθανασία 시술을 받아서 고통 없이 세상을 하직할 수 있을 테니까요. 3000만 원 정도의 비용이 든다고 합니다. 고통 속에서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하고 싶지 않습니다. 건강하면 사정이 다르지요. 미국의 경제학자, 생태주의자, 스톳 니어링Scott Nearing은 100세의 나이에 스스로 곡기를 끊었습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면, 죽기 좋은 맑은 하루를 선택하여 단식으로 생을 마감하는 것도 멋지고 아름다운 일이겠지요? ㅎㅎ
..............
(추신)
A: 내가 존경하는 1941년생 김상일 교수님은 미국에서 집필에 몰두하는데, 시간이 모자라는 것을 몹시 안타깝게 여긴다고 합니다.
B: 네, 그분은 행여나 뇌세포가 파괴될까봐 알코올을 한 방울도 섭취하지 않는다지요?
A: 우리보다 나이 많은 그분도 그렇게 치열하게 자신을 관리하는데, 왜 우리가 벌써부터 늙은 체 해야 합니까?
B: 그래요?
A: 함석헌 선생님은 병든 아내를 간호하는 와중에도, "바가바드기타"를 번역하였습니다. 죽음의 벼랑에 관한 생각을 떨치고 무언가에 몰두하다가 오리 한마리처럼 하직하는 게 어떨까요?
B: 그건 당신 생각이지요. 견마지령 (犬馬之齢) 이라고 팔자대로 살다가 갑시다.
A: 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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