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모만큼 지속적인 것도 없다.” (헤라클레이토스)
“아직 아님”의 정서 속에는 최상의 행복에 대한 기대감이 자리하고 있다. (필자)
1. “아직 아님”에 도사린 네 가지 발전적 특징: “아직 아님”이라는 블로흐의 철학 용어는 무엇보다도 가능성에 관한 형이상학의 인식론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개념은 이전의 서양 철학에서 심도 넘치게 논의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블로흐는 “아직 아님”을 통해서 고전적 형이상학의 네 가지 기본적인 논의를 이어 나가려고 합니다. 첫째로 “아직 아님”은 가능성의 개념에서 자리하는 발전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둘째로 그것은 “추구streben”의 개념 속에 도사린 발전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셋째로 “아직 아님”은 “부정성 Negativität”의 개념 속에 도사린 발전을 지칭할 수 있습니다. 넷째로 “시간성 Zeitlichkeit”, 특히 미래의 시점에 자리하는 발전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첫째로 가능성, 즉 가능한 무엇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가능할 수 있는 무엇, 즉 존재 가능성과 관련됩니다. 가능성은 논리성의 법칙에 위배하지 않은 채 생각될 수 있는 무엇으로서 사고 가능성을 가리킵니다. 물론 이러한 의미는 서양 철학사에서 다양한 입지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 가능성을 “에너지 내지는 능력 δύνάμις”으로 이해했습니다. 무언가 변화되어 나타나려는 세력이 그러한 개념의 특징이라고 했습니다. (WPB: 424). 그렇지만 그는 제한적인 의미에서 이전에 이미 주어졌던 소질 내지는 고유성을 실현해내려는 무엇을 가능성이라고 파악했습니다. 아직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실현될 수 있는 무엇은 가능성 속에 주어진, 현존재의 본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기능성을 지닌 존재”가 내용으로 하는 것은 무언가 추구하는 성향을 지닌 엔텔레케이아라고 합니다.
2. 가능성의 목표 지향성: 모든 목적론은 가능성의 추구를 통해서 정해지게 된 것입니다. 라이프니츠는 이러한 목적론을 바탕으로 “영혼”을 한마디로 “동물의 엔텔레케이아”라고 규정할 수 있었습니다. (Leibniz 1983: § 74, 79). 목적론이 데카르트 이후의 자연과학은 “목적론이 존재의 해명 원칙으로서 무조건 절대적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밝혀내었습니다. 그렇지만 형이상학, 특히 인간과 신의 관계 내지는 인간과 절대적인 무엇에서는 목적론의 방향은 당시에는 여전히 용인되고 있었습니다. 존재론으로 이해되는 목적론의 마지막 목표는 근대에는 오로지 완전성을 통해서 용납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직 아님”의 두 번째 특징으로서의 추구의 문제와 만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목적론은 의지 그리고 추구의 개념과 접목되고 있습니다. 플라톤의 경우 에로스의 요망 사항은 무한성에 대한 유한성을 해명하기 위한 주요 개념입니다. 에로스의 요청은 향수(郷愁)의 형태를 상정하게 합니다. 왜냐면 사람들은 무한성을 통상적으로 고향의 특징으로 생각하면서, 과거에 자리하던 무엇으로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 특징입니다. 현존재의 역동적 행위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어떤 “추구”를 지향합니다. 가령 현존재는 근본적으로 맨 처음의 “결핍되지 않은 존재”의 상태, 즉 신성(神性)으로 향하려는 의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추구의 목표는 고전적 형이상학에 의하면 언제나 되돌아옴, 다시 말해 “회귀”로 향하게 된다고 합니다.
3. “아직 아님”에 자리하는 추구와 의지의 문제: 추구라는 존재론의 개념은 스피노자에 이르러 “코나투스conatus”, 즉 관성(慣性)이라는 현존재의 의지로 변화되었습니다. 물론 스피노자 이전에도 코나투스라는 단어는 드물게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어 “όρμη”에서 유래된 단어였는데, 스토아학파 사람들은 이 단어를 “충동impetus”의 의미로 이해한 바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행동하는 에너지 내지는 움직임의 성향”을 “코나투스”라고 명명했는데, 이러한 에너지는 신에 의해 부여되는 무엇이라고 파악되었습니다.
그런데 코나투스는 스피노자에 의해서 신의 작용이 생략된 현존재의 순수한 관성이라는 성향으로 정해지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라이프니츠는 “존재에 대한 필요성 내지는 요구사항exigentia existentiae”에 관해서 명징하게 지적했는데, 이 개념은 “가능성의 실현에 대한 근본적 원인”으로 이해됩니다.
뒤이어 쇼펜하우어와 니체는 “추구”의 개념을 다른 식으로 해석했습니다. 말하자면 의지는 현존재의 발전 가능성과 관련하여 형이상학적 첫 번째 원칙이지만, 이에 대한 비판적 논거로서 “의지가 완전성에 대한 요구사항으로 단언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부언하였습니다. (Martin Heidegger: Nietzsches Lehre vom Willen zur Macht als Erkenntnis, hrsg. Eberhard Hanser, Stuttgart 1989.) 독일의 철학자 하인츠 하임조에Heinz Heimsoeth는 추구와 의지라는 두 개념이 독일 철학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구명했습니다.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이 궁극적으로 권력에 대한 의지와 같은 의미의 사고 형태라고 논평한 바 있는데, 하임조에는 이 의견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Heinz Heimsoeth: Die sechs großen Themen der abendländischen Metapysik und der Ausgang des Mittelalters, Berlin 1822,) 그렇지만 블로흐는 “아직 아님”을 도입하면서, 이들의 입장을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즉 쇼펜하우어의 추구하는 의지의 개념은 존재 자체 속에 위치하는, 실현을 촉구하는 자극이라는 것입니다.
4. “아직 아님”과 부정의 신학: 셋째로 “아직 아님”은 존재를 거부하는 부정의 신학과 관계됩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블로흐는 현존재의 특징을 “아직 아님”으로 규정합니다. 현존재는 단순히 “S는 아직 P가 아니다.”라는 관점의 ”주어와 술어의 연결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고대에 출현한 부정의 신학에서 아직 아님의 변증법적 특징이 발견될 수 있습니다. 블로흐는 고대의 철학자, 프로클로스Prolos 그리고 디오니시오스 아레오파기타가 추적한 부정의 신학에 관한 논거를 천착합니다. 이들에 의하면 신(神)은 그저 간접적으로 흐릿하게 인지되는 존재입니다. 왜냐면 인간의 경험은 제한되어 있으므로, 영혼, 정신, 사고, 판타지, 숫자 그리고 크기 등과 같은 방식으로 신의 고유한 본성을 전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WPB: 447). 가령 프로클로스는 변증법적 모순을 통해서 진정한 세계를 찾기 위한 항로를 과감하게 개척한 신플라톤주의자였습니다. 그는 “머무름, 출현 그리고 회귀”라는 발전의 세 단계를 도출해내었는데, 이는 헤겔에 이르러 결실을 안겨주게 되었습니다. 블로흐는 자신의 저서 『주체와 객체, 헤겔에 대한 주해』에서 이를 언급한 바 있습니다. (Bloch, SO: 357).
인간은 블로흐에 의하면 자신의 근본적 정체성 또한 명시적으로 통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기이하게도 인간성의 본질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는 참으로 기이한 현상인데, 마치 통증을 느낄 때 우리는 신체의 이상 증세를 감지하듯이, 심리적으로 상처를 입을 때 특정 인간의 사회적 존재를 일시적으로 유추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행위의 기준으로 작용하는 것이 바로 아직 아님이라는 확인 작업입니다. 블로흐는 부정의 신학적 견해를 접하면서도, 신에 대한 불가지론을 내세우지 않고,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존재 내지는 인식을 방해하는 존재가 개방되어 있다는 사실을 놀랍게도 도출해내고 있습니다.
5. 아직 아님에 자리하는 시간적 특징: 넷째로 “아직 아님”은 블로흐에 의하면 시간적 차이를 전제로 한 개념입니다. 현존재에 주어진 시간적 간격은 어떻게 해서든 중개되어 어떤 가능성을 암시해줍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마지막 상태로서의 존재로서의 이행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현존재의 추구, 의향 내지는 노력은 성취 그리고 파기의 과정을 거쳐서 언젠가는 완전한 존재의 면모를 드러내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로써 완전성은 쿠자누스Cusanus의 표현을 빌면 “모든 것 속의 모든 것” 내자는 생기 넘치는 공동체의 유토피아로 최종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마지막 시간이 처음부터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적어도 변화에 대한 존재의 열망이 자리하는 한- 최소한 허망한 종말로 끝나게 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블로흐는 신앙의 측면에서 이해되는 묵시록 내지는 구원에 대한 이념을 역사적으로 추적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아직 아님”은 기대감이라는 지평과 접목된 시간적 특징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아직 아님”은 얼마든지 환멸을 가져다줄 수 있는 희망입니다. 인간의 존재는 자신의 갈망을 의식적으로 수행하고 하나의 사명으로서 실천해 나갑니다. 언젠가 키르케고르는 “실존 속에서의 자기 구원”을 철학적 그리고 신학적 차원에서 추적한 바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아직 아님을 중시하는 철학 사상의 선구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직 아님”은 책임 있는 행위의 가능성에 대한 하나의 조건입니다. 그렇기에 그것은 –블로흐가 암시한 바 있는- 도덕의 기본적 개념으로 수용될 수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인간 심리 속에 자리하는 리비도를 과거지향적으로 추적하여, “더 이상 의식되지 않는 무엇”을 밝혀낸 바 있습니다. 블로흐는 이와는 달리 인간이 처하고 있는 사회 경제적 상태를 미래지향적으로 추적하여, “아직 의식되지 않은 무엇”으로서의 기대 정서를 찾아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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