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서해성 선생님의 감칠 맛 나는 글을 허락 없이 한겨레 신문에서 퍼왔습니다.
양해를 구하면서....
또한, 이백에 취해 술 한 잔으로도 장하게 살고, 두보를 읽어 천년을 서리처럼 깨운다. 봄날 곡강 근처에서 그가 저당 잡히고 마신 헌 저고리를 체온 그대로 입어보게 하는 게 시다. 87행짜리 백거이 비파행 사이에 도사린 침묵을 문득 알아차린 건 어제그제 마흔 무렵이다. 장계의 풍교야박 탓에 뱃머리에 부딪는 물결이 절로 단풍든 걸 어찌 하랴. 이천 몇 백 년을 두고 형가와 대작하고파 이수를 찾던 날에는 비가 내렸다. 시황제야 비껴갔지만 그 시의 칼에 찔리지 않은 이 누가 있겠는가. 강 건너 소리 파는 여인네 망국한을 모른다 했거늘 후정화가 그저 옛 노래가 아님을 새길 수 있었던 건 두목이 시로 젓는 배를 얻어 타고 진회수에 이른 터다. 한-미 에프티에이가 발효되던 날 그대가 들은 노래는 무엇이던가.
이방 말이 입안에 고이면 피임약을 먹듯 얼른 외던 시들, 배가 고픈 날에도 아껴 먹던 어미 말들. 청산은 여위건만 부서질 것 같은 책갈피 사이에서도 머리칼 한 올 검어지는 법 없는 게 시다. 북새 사람 이용악을 따라 오랑캐령 쪽으로 더러는 털미투리 신고 눈길을 좇아보라. 여진이 쫓겨 가면서 두고 간 이름 투먼강 마지막 물 서수라에서 모국어는 언 눈 녹여 이를 닦고 있다. 우라지오 안개 깊어 아무을만도 그저 그에게 익힌 아롱범 같은 마우재 소리. 백석이야 서리서리 감춰둔 말의 골짜기에 나타샤가 눈발로 퍼부어 그의 향리 덩(정)주군지를 낀 채 잠이 들곤 했다. 여적지 우리 홍경래 장군 날아오르는 문허진 성벽 뒤에서 밤을 지새우던 소리들은 김소월의 가락을 타고 진두강 가람 목까지 차가운 데를 저기 건너가고 있다. 그의 말이 이른 곳은 덥든 춥든 죄 모롱이에 꽃 지는 조선 땅이었다.
김수영을 스승으로 삼고서야 침 한번 탁 배앝고는 골목도 대로로 알고 걷고, 김남주 덕에 말을 낫처럼 갈아 머리맡에 놓고 잠에 든다. 성님은 하마면 시방도 저승에서 숫돌을 찾고 계실 거다. 김지하를 감춰 읽어 길도 심장을 닮은 걸 단박에 깨친 밤 뜨거운 황톳길로 내달려간 발길들은 지금 어디쯤일까. 산맥 굽이굽이 내달리다 문득 치열한 비약으로 솟구치는 고은을 안성 대폿집에서 뵈었길래 술 한 잔 쳐 올렸더니 아무렇게나 세인트헬레나로 가자신다. 남대서양 망망한 바다 한쪽 잘라내 수인 나폴레옹에게 해 입히고는, 스무 살 때 얻어맞은 시디신 무릎 뼈를 차라리 고아 먹어버리고 싶다. 싱싱한 간디스토마에 걸려도 좋다. 신동엽을 부르며 곰나루까지 동학군 되어 종군하던 언 밤에 감발을 쳐준 건 아편덩어리를 탄 술 석 잔으로도 미처 죽지 못한 황현이었다. 거기서 모든 한시는 마땅히 절명해야 했다. 매천이 몸을 내려놓은 구례 높은 두류산에는 뿔테안경을 낀 붉은 까마귀 하나이 검은 허공을 맴돌며 부르길, 칼을 품고 끓는 피로 쓸지어다. 고수레! 이 아침 맑은 술 한잔이 동한다. 술이 말을 잊으면 독주고, 글이 칼을 모르면 술맛이 삭는다. 칼이 술을 떠나면 천하가 얕다. 말 술 칼은 하나다.
시를 읽는 사람은 다 칸칸이 살고 시를 쓰는 사람은 칸을 잇대어 죽는다. 관은 본디 좁아 시가 들어갈 여백이 없다. 땅은 얕아 묻힐 터가 없다. 시에는 무덤이 없다. 썩지 않으므로 장사 지낼 일도 없다. 별과 달은 져서 어디로 가는가. 여인네들이 새벽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건져 올려 집으로 가져갔다네. 시가 아니라면 정한수 녹은 별을 가슴으로 들이마실 수 없어라. 시가 없는 시대를 건너면서 시 없는 시를 쓰는 까닭이다. 시를 모르는 자, 또한, 귀부터 썩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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