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알림 (명저)

블로흐의 자연법과 인간의 존엄성

필자 (匹子) 2024. 6. 10. 09:18

 

 

 

 

 

친애하는 L,

 

번역 과정에서 참조하려고 영어판을 읽었으나, 영어판은 그리스어, 라틴어 문장을 아무런 설명 없이 그대로 기술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미국인들이 책을 읽을 경우 그리스 라틴어의 뜻을 몰라서 무척 난감하리라고 여겨집니다. 그밖에 영어판에는 각주가 하나도 없습니다. 각주가 없으면, 문맥 가지고 모든 것을 파악하라는 말인가요?

 

진정한 번역서는 원본보다도 두 배 정도 두터울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역자는 독자를 배려하여 설명을 첨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다시금 한 가지 사항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영어만 공부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다. 학문 하는 자가 영어만 공부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다."

 

무엇보다도 기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그 하나는 당신과의 약속을 지켰다는 점이며 (나는 당신에게 2월 말까지 번역을 완료하겠다고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독문학자의 저력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독어독문학자들이 독일어와 문학만 다루고 그밖의 다른 영역을 다루지 않는다고 지레짐작합니다. 여기에는 독문학 전공자들이 역사, 신학, 철학 그리고 법학 등을 모른다는 선입견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학문의 수레를 끌고가는 사람들은 순수 문과 그리고 순수 이과 연구자들입니다. 대학을 이끌어가는 학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리대 학부입니다. 가령 신학 그리고 법학의 영역은 순수 인문학의 학문적 결실에 근거하여 실천적인 연구 결과를 도출해내곤 하지요. 법학도들은 별로 공부를 많이 하지 않지만, 사회에서 높은 자리 얻어서 권력을 휘두르며 살아갑니다. 과연 나의 번역서가 그들에게 읽힐지는 의문입니다. 하기야 사법 연수원생들은 주로 법 조항을 담고 있으며, 법원에서 활용되는 소송 서적과 판례를 읽을 뿐이지요.

 

 

 

독일에서도 법학 공부하는 사람들은 붉은 책의 법전만 달달 외우면서 수년을 보냅니다. 독일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한국 학생들이 있는데, 그들의 독서량은 문학과 철학 전공자에 비해 훨씬 모자라더군요. 그렇다고 내가 이 자리를 빌어서 법학의 가치를 하락시키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다만 독어독문학을 전공한 분들 가운데에는 참으로 훌륭한 실력자들이 많다는 것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기 위해서 철학, 심리학, 역사학, 교육학 등 부전공을 이수하였는데도, 한국의 폐쇄적 학문적 분위기 때문에 전임이 되지 못한 실력자들 부지기수입니다. 여기서 나는 6.25 동란 이후에 태어난 세대 (가령 53년생부터 65년생에 이르는) 독문학자들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앞으로 중요하지만 연구되지 않는 분야를 찾아서 천착하는 후학들이 많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사법연수원 학생이 이 책을 읽지 않더라도, 누군가 이 책을 읽어서 활용했으면 참으로 고맙겠습니다.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