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문학 이론

서로박: (1) 벤야민의 역사 철학 테제

필자 (匹子) 2024. 4. 29. 09:11

 

“벤야민은 ‘모든 것을 지니지만, 어떠한 무엇도 소유하지 않는다. Omne habentes, nihil possidentes’라는 거리감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필자)

 

1. 머뭇거리는 뷔리당:

 

20세기 초 유럽의 예술 사조는 일직선으로, 혹은 지그재그 방식으로 이어졌는데, 19세기 말에 이르러 복합적으로 뒤엉켜 사통팔달로 퍼져 나갔습니다. 산업의 성장과 식민지 개발로 인하여 산업이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했으며, 많은 실험적 예술 사조들이 동시적으로 한꺼번에 출현하였습니다. “세기 말fin de siècle”의 예술적 경향, 표현주의, 다다이즘, 상징주의는 물론이며, 아방가르드 운동은 문학예술에서 많은 자극을 가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국가 중심의 자본주이, 도시 중심의 경제 구도와 대도시의 형성, 무역과 식민지에 대한 열광 등이 어우러져서, 사회가 복합적이고 전문적으로 변화한 데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Ashholt: 109). 벤야민은 빠른 시대적 변화와 상응하게 유럽 중심부인 베를린에서 이러한 다양하고 복합적인 예술적 조류를 하나씩 섭렵해 나갔습니다.

 

미리 한 가지 지적할 사항이 있습니다. 벤야민은 정치적 신념에 있어서는 머뭇거리는 뷔리당이었습니다. 두 개의 꼴 사이에서 하나의 선택을 망설이다가, 결국에는 굶어 죽는 비유는 프로이트의 심리학에서 애증 (愛憎, ambivalence)으로 표현된 바 있습니다. 벤야민은 실제 현실에서 머뭇거리는 뷔리당으로 어정쩡하게 처신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한스 마이어Hans Mayer의 주장대로 유대주의냐, 마르크스주의냐를 놓고 오래 고심하다가, 어떠한 무엇도 확실하게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마르크스 뮌처: 87).

 

벤야민의 마지막 삶은 일상사에서 치밀하지 못하고, 서투른 좌충우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1940년 무렵에 프랑스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던 게 어쩌면 잘못된 판단이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차라리 사회주의를 선택하여 일단 소련으로 향하거나, 아니면 친구, 게르숌 숄렘Gershom Scholem과 함께 유대주의를 선택하여 팔레스티나로 향해야 했을지 모릅니다. 벤야민은 끝내 굶어 죽는 뷔리당의 당나귀처럼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행동한 셈입니다. 1941년에 벤야민은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국경 근처에서 체포되어, 절망적 상태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벤야민의 정치적 둔감함은 과연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요? 필자는 조심스럽게 그 이유를 벤야민의 예술적 색안경에서 찾고 싶습니다. 사실 벤야민은 단 한 번도 예술 영역의 바깥에서 세계와 마주친 적이 없습니다. 왜냐면 현실의 영역은 벤야민에게는 예술이라는 프리즘을 거친 “가상의”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Benjamin, Briefe: 321). 변증법적 이미지는 그에게는 꿈의 이미지이며, 역사, 혁명 등은 미학이라는 매개체에 의해서 중개된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혁명은 “집단의 이미지 공간”과 “신체 공간”의 상호 침투로 이해될 뿐입니다. (최성만: 65). 여기서도 드러나듯이 벤야민은 혁명을 사회 정치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는 게 아니라, 일차적으로 예술의 영역 내지는 비평의 영역이라는 프리즘에 의해 비친 세계를 고찰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예술의 역사는 실질적 인간사와는 다른 차원에서 이해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벤야민의 “인간학적 유물론anthropologischer Materialismus”에서 중요한 것은 아도르노가 편지에서 지적한 바 있듯이 인간의 신체입니다. (Benjamin, GS. VII/ 2, 864). 벤야민은 물질의 개념을 인간의 인식 범위 밖에서 고찰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인간학적 유물론은 블로흐의 물질 이론에 의하면 동어반복에 불과할 뿐입니다. 왜냐면 블로흐의 물질 개념에는 인간이 물질의 카테고리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변화, 역사 그리고 혁명은 벤야민의 경우 오로지 예술과 예술 작품이라는 색안경에 의해 투시될 뿐입니다. 벤야민이 비평을 “작품들의 무효 선언”이라고 규정하는 이유도 벤야민이 예술이라는 도수 높은 색안경을 단 한 번도 벗어 던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3. 4, 5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