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문학 이론

서로박: (1) 벤야민의 역사 철학 테제

필자 (匹子) 2024. 4. 29. 09:11

1. 머뭇거리는 부리당

 

친애하는 J, 20세기 초 유럽의 예술 사조는 일직선으로, 혹은 지그재그 방식으로 이어졌는데, 19세기 말에 이르러 복합적으로 뒤엉켜 사통팔달로 퍼져 나갔습니다. 산업의 성장과 식민지 개발로 인하여 산업이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했으며, 많은 실험적 예술 사조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하였습니다. “세기말fin de siècle”의 예술적 경향, 표현주의, 다다이즘, 상징주의는 물론이며, 아방가르드 운동은 문학예술에서 많은 자극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벤야민은 빠른 시대적 변화와 상응하게 유럽 중심부인 베를린에서 이러한 다양하고 복합적인 예술적 조류를 하나씩 섭렵해 나갔습니다. 오늘은 당신에게 발터 벤야민의 소논문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를 언급하려고 합니다. 벤야민의 이론은 국내외적으로 기이하게도 긍정적으로 수용되곤 합니다. 미완성으로 남은 문헌들은 정치적으로 그리고 예술적으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전해줍니다.

 

벤야민은 예술 전반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정치적으로 그리고 예술적으로 하나의 확고한 입장을 정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가 모든 예술적 사상적 조류에 관여하지만, 어떤 한 가지도 선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과거에 프란체스코 수사들이 취했던 행동, “모든 걸 지니지만, 어떠한 무엇도 소유하지 않는다. omne habentes, nihil possidentes"라는 거리감의 자세와 연결됩니다. 프란체스코 수사들은 이러한 말로써 아우구스티누스의 발언을 수정하여, 신에 대한 겸허함을 표현하려 했습니다. (Augustinus Hipponensis, Sermo 85: 3. 3).

 

애착의 대상에 가까이 다가가지만 끝내 그 대상과 결합하지 않으려는 특징은 에로스에 관한 플라톤의 사고에서도 나타납니다. 나아가 이러한 특징은 게오르크 짐멜Georg Simmel이 사회학적으로 천착한 사물의 교환 관계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각설, 벤야민은 당시에 회자하던 학문과 예술에 관한 혁신적 사항들에 접근해 나갔지만, 어떠한 이념 내지는 예술적 방향을 받아들여서 깊이 체화하지는 않았습니다. (Henning Günther: Walter Benjamin und der humane Marxismus, Olten u. Freiburg 1974, S. 83.) 특히 정치적 이념의 경우 수수방관하는 제삼자의 태도로 일관했습니다. 이는 어떤 무엇에 책임지지 않으려는 유대인 특유의 소극성 내지는 신중함 때문인지 모릅니다.

 

자고로 한 인간이 어떤 사안에 대해서 불명료한 태도를 견지하면, 사람들은 당사자를 회색분자라고 간주합니다. 예컨대 에른스트 블로흐가 소련이 건설된 다음에 새로운 사회주의의 탄생을 찬양하여, 주위로부터 어리석은 돈키호테라고 비난당한 데 반해서, 벤야민은 점액질의 소극성으로 자신의 신중함만 표명했을 뿐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블로흐가 마치 돈키호테처럼 작은 실수를 좌시하면서 자신의 신념을 마르크스에서 찾으려고 했다면, 벤야민은 마치 머리 따로, 마음 따로 움직이는 햄릿처럼 처신했는지 모릅니다. 물론 우리는 이를 무책임하고 이율배반적인 방관주의라고 질타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식인이라면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급변하는 시기에 크고 작은 오류를 완전히 피해 나갈 수는 없습니다. 더욱이 개개인의 생존을 힘들게 하는 난세가 자리하는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벤야민은 한스 마이어Hans Mayer의 주장대로 유대주의냐, 마르크스주의냐를 놓고 오래 고심하다가, 어떠한 무엇도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마르크스 뮌처: 87). 일상의 삶에서 치밀하지 못하고, 서툰 행동으로 일관했습니다. (1940년 무렵에 프랑스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던 게 어쩌면 잘못된 판단이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차라리 사회주의를 선택하여 일단 소련으로 향하거나, 아니면 친구, 게르숌 숄렘Gershom Scholem과 함께 유대주의를 선택하여 팔레스티나로 향해야 했습니다. 벤야민은 마치 두 개의 건초 더미에서 하나를 선택하지 못하고 노심초사하다가, 끝내 굶어 죽는 부리당의 당나귀처럼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행동한 셈입니다. 1941년에 벤야민은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국경 근처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어떤 절망적 상태에서 안타깝게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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