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문학 이론

서로박: (3) 벤야민의 역사 철학 테제

필자 (匹子) 2024. 5. 1. 09:36

(앞에서 계속됩니다.)

 

3. “지금 시간”과 천년왕국설의 유토피아

 

그렇다면 벤야민은 과연 역사 철학에서 말하는 진보를 부정하는 것일까요? 그렇다고 함부로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소논문에는 미래에 대한 기대감 내지는 유대주의와 기독교 사상에서 나타난 천년왕국설의 사상적 출발점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는 신학 그리고 유물론 사이의 공동 유희는 상호 배움의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 하나는 종결되지 않은 역사의 특성 내지는 구원의 필연성이며, 다른 하나는 혁명적 투쟁의 필연성 내지는 마르크스주의 실천의 필연성입니다. 이에 첨가되는 것은 블랑Blanc, 소렐Sorel 그리고 바쿠닌Bakunin 등의 아나키즘 전통일 수도 있습니다. 벤야민은 메시아의 세속적 구원을 마르크스가 말하는 계급 없는 사회로 파악하였습니다.

 

사회 민주주의, 당시의 러시아 상황 그리고 19세기의 유럽에서 파생된 사상 등은 벤야민에 의하면 하나의 이상으로서의 계급 없는 사회와는 동떨어진 것들이었습니다. 파시즘의 도래에도 불구하고 벤야민은 역사적 유물론에 대한 기대감을 완전히 파기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변증법적 역사의 구성은 현실 정치에 그대로 대입되는 게 아니라, 현실 정치의 지침으로 원용될 수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벤야민의 문헌에서는 자유의 나라에 관해 의구심을 표명한 문장이 간간이 발견됩니다. 벤야민은 무엇보다도 파국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는 하나의 사상의 촉수를 발견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림들, 유사성, 비유 등이 동원되고 있습니다. 이로써 이론과 실천의 결합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하나의 일원성이 도출될 수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요약하건대 벤야민이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에서 추적한 것은 20세기 전반부에 파시즘의 폭력에 휘말리면서, 어떻게 하면 인간 역사의 방향이 바르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이었습니다. 벤야민의 역사 철학 테제는 한마디로 진보에 대한 성찰 내지는 숙고로 이해될 뿐,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인간의 보편적 역사에 대한 이론이라고 예단할 수는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그의 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시간Jetzt-Zeit”의 의미입니다. 지금 시간은 의향에 있어서 “우주적인 구원의 재정립”, 즉 아포카타스타시스αποκατάστασης를 감지하는 순간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벤야민은 과거에 존재했던 진리가 아니라, 어던 깨달음에 암시를 가하는 “지금 시간”을 강조합니다.

 

과거의 무엇 그리고 현재의 무엇 사이에 존재하는 단 한 번의 상태는 구원의 사고로서의 “지금 시간”과는 다른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순간Augenblick”은 어원에 의하면 인간이 “눈Auge”을 “뜨는blicken” 찰나입니다. 지금의 시간은 태어난 아기가 처음 눈을 뜨는 찰나로와 같습니다. 이때 아기는 아우라의 원초적 현상으로서의 별자리와 스스로 닮으려고 노력합니다. (윤미애: 395). 이를 고려한다면 “지금의 시간”은 유대 철학에서 말하는 새롭게 “깨닫는 사고Eingedenken”라는 미래지향적 의향과 일치되는 것입니다. 여기 “모든 순간(秒)은 구세주께서 들어설 수 있는 작은 문이었노라”라는 구절을 생각해 보세요. (이사야 26장 20절을 참고하라). 세계의 구원을 바라는 자는 어떤 응축된 시간, -에크하르트 선사의 표현을 빌자면- “고정된 지금 nunc stans”의 순간을 스스로 체험하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유토피아는 더 나은 사회의 삶을 서술한 국가소설에서 문학적으로 묘사된 바 있습니다. 토머스 모어 이래로 수많은 국가소설 속에는 더 나음 삶이 정태적인 시스템 내지는 구도 속에서 서술되고 있습니다. 국가소설 속에 반영된 휘황찬란한 삶 그리고 기이한 사회 구도의 배후에는 특정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제점에 대한 비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작가의 시대비판은 이른바 유토피아의 첫 번째 기능입니다. (희망의 원리 A: 126). 더 나은 삶에 대한 갈망의 상은 놀랍게도 모어 이전부터 나타난 천년왕국설에서도 발견됩니다. 그것은 제삼제국을 갈구하는 조아키노 다 피오레의 사상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첫 번째 시대가 “두려움 그리고 설화”가 난무하는 시대이고, 두 번째 시대는 “탐사 그리고 지혜”로 가득 찬 시대라면, 세 번째 시대는 “사랑 그리고 깨달음”으로 충만한 시대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에는 성령이 분출하여 완전하게 자리하는 강림의 축제가 만연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시간이 별들이 반짝이는 밤이었다면, 두 번째 시간은 빛이 서서히 밝아오는 여명이고, 세 번째 시간은 성령과 함께 하는 찬란한 낮이 되리라고 합니다. 이러한 시간은 성부가 아니라, 인간의 아들에 의해서 우리에게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Bloch, EdZ: 135).

 

지금 시간은 “구원을 갈구하는 인간의 응집된 순간”일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은 신이 아니므로 완전한 개벽 내지는 구원이 반영된 삶을 영원하게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기도와 명상 등을 통해서 비록 순간적이지만 세계 구원이 실현되는 놀라운 상을 순간적으로 감지할 수는 있습니다. 에크하르트 선사는 이를 응축된 시간 내지는 “고정된 지금nunc stans”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저항과 반역: 413). 구원을 갈구하는 자가 꿈꾸는 천년왕국에 관한 상인데, 놀라운 폭발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19세기 프롤레타리아는 이러한 꿈을 견지하면서, 평등하고 축복받은 삶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이야말로 유토피아의 두 번째 기능입니다.

 

그렇다면 벤야민이 언급한 “깨닫는 사고Eingedenken”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사고는 지금 시간에 떠올리는 생각인데, 과거에 존재했던 완전한 무엇을 다시 한번 환기하는 사고는 아닙니다. 깨닫는 사고는 이미 과거에 존재한 사고 내지는 착상과 같은 "재-기억αναμνήσεις"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Eingedenken”은 과거의 사고를 다시 떠올리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한 번도 의식하지 못한 사고를 능동적으로 새롭게 찾아낸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박설호 2: 226) 그것은 "이미 본 것 De ja-vu"을 다시 뇌리에 떠올리는 “재현 행위”가 아니라, 지금까지 한 번도 의식하지 못한 착상을 능동적으로 발견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이는 블로흐가 자신의 물질 이론에서 추적한 "아직 아닌 존재 das Noch-Nicht-Sein"를 찾는 작업과 같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결핍되어 있던 무엇을 새롭게 마련하려는 갈망에서 도출할 수 있는 “새로운 무엇Novum”입니다.

 

독일의 신비주의자, 에크하르트 선사는 "고정된 지금“의 응축된 새로운 착상으로써 찬란한 해방의 순간을 체험하려고 했습니다. 수사들의 이러한 종교적 체험은 평범한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갈구하는 해방과 완전히 구분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가난하고 못 배운 자가 지금까지 한 번도 의식하지 못했던 계급의 문제를 자신의 처지에 적용하는 경우를 고려해 보세요. 그렇기에 "지금 시간"은 자신을 둘러싼 계급의 문제를 새롭게 인지하는 순간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은 ”남은 시간으로서의 종말의 시간parousia“과 구분되는 게 아니라 (김영룡: 182), 영겁으로서의 응축된 시간입니다. 포괄하는 벤야민은 과거의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어떤 아우라를 유추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지금 시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지금 시간은 아우라를 감지하는 순간일 뿐 아니라, 가난과 폭정이 사라지고, 가난한 노동자가 지상의 행복을 만끽하는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이를 고려할 때 깨닫는 사고는 과거에 존재했던 진리를 다시금 수동적으로 막연하게 떠올리는 “재-기억anamnesis”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릅니다.

 

(4, 5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