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문학 이론

서로박: (4) 벤야민의 역사 철학 테제

필자 (匹子) 2024. 5. 3. 10:14

(앞에서 계속됩니다.)

 

4. 신학적 예술적 은유는 확고한 견해와는 다르다.

 

벤야민은 생전에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를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소논문은 어처구니없이 잘못 이해될 소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는 벤야민이 20세기 초 프로이센의 다양한 문예 사조 그리고 혼란스러운 시대정신을 철학적으로 그리고 예술적으로 탐색하는 과정에서 기술된 문헌입니다. 게다가 역사 철학 테제는 –소논문이라고 명명할 수 없을 정도로- 연구 대상을 명징하게 분석한 글이 아니라, 알레고리를 동원한 서술, 신비로운 비유 그리고 패러디 섞인 고뇌의 흔적 등을 보여줍니다. 누군가 벤야민의 글에서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보편적 이론의 논거를 도출하려는 작업은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어쩌면 잘못된 처사일지 모릅니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문헌이 드러내는 신비로운 비유를 고려하면서 벤야민의 소논문을 명징한 계몽성을 거부하는 글이라고 혹평하였습니다. (Habermas: Merkur Nr. 293, 1972). 만약 누군가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에서 어떤 정치적 실천에 관한 직접적 지시 사항을 찾으려 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실패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왜냐면 –롤프 티데만Rolf Tiedemann이 정확히 지적한 대로- 벤야민의 신학적 은유는 토론을 통한 특정하고도 구체적인 해결책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근자에 한국에서 벤야민 연구서 두 권이 간행되었습니다. 그 하나는 최문규의 『파편과 형세』 (2012)이며, 다른 하나는 최성만의 『벤야민 연구』 (2024)입니다. 최성만의 문헌은 벤야민 예술론을 엄정 중립적으로 파헤치려는 정교한 작업이라는 측면에서 강점을 지니지만, 연구자의 고유한 입장 그리고 이와 결부된 벤야민 비판이 명징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필자는 이 자리에서 『파편과 형세』만을 집중적으로 논하려고 합니다.

 

제목에서 말하는 “파편”은 특수한 부분, 미완성의 단장 등을 가리키는 단어인데, 전체, 객관 그리고 보편성과는 반대되는 특징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예술과 역사에서 나타나는 특수성, 단편성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역사의 불연속성과 관련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형세Konstellation”는 별자리의 박힌 형태 내지는 짜임 관계를 지칭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최문규의 벤야민 연구가 불변하는 상태 내지는 순간, 어떠한 변화를 용인하지 않는 파르메니데스의 불변성을 지향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만물은 변한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시간적 변화의 움직임이라든가, 변증법적 역동성은 『파편과 형세』에서 거의 무시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두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로 저자는 벤야민이 역사 철학의 사고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을 부정적으로 고찰하고 있습니다. 물론 벤야민이 랑케의 역사주의를 통렬하게 비난한다는 최문규의 주장은 분명히 타당합니다. 그런데 벤야민은 시종일관 역사적 파국 앞에서 진보의 불연속성을 지적했습니다. 이 경우 역사의 불연속성과 파괴는 순간으로 선회하여 급작스럽게 나타난 것입니다. (Schmidt: 9). 여기서 벤야민은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에 대해 전적으로 반기를 드는 것은 아니고, 진보를 위한 변화가 순간적으로 역사를 중단케 한다는 식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의 명백성에 대해 자신의 의혹을 명질하게 표명했을 뿐입니다. 벤야민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계급 없는 사회는 역사 속에서 진보의 궁극적 목적이 아니라, 종종 실패로 끝난 진보의 중단이다.” (Benjamin, GS 1: 1231)

 

자고로 전환기의 시점에는 역사적 발전이 일순간 단절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자유의 나라”는 단순히 “우주적 구원을 재정립한” 사회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블로흐에 의하면 과거의 찬란한 사회적 상태를 순간적으로 투시한 사회상이 아니라,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서 출현할 수 있는, 가능한 나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최문규는 어떤 더욱 훌륭한 사회적 삶을 만들려는 인간의 노력이 궁극적으로 히틀러와 스탈린의 전체주의적 폭력을 불러일으켰다고 암시하면서, 마르크스주의를 근본적으로 전체주의의 허상이라고 매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입장은 카를 하인츠 보러가 대니얼 디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에서 찾으려고 한 “어떤 손상된 유토피아”의 미학과 연결됩니다. 새로운 땅(식민지)으로부터 더 많이, 더 빨리 재화를 차지하려는 서양인들의 노력은 결국 그를 무인도에 갇히게 만들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식민지 쟁탈이라는 서구적 시각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찬란한 미래를 갈구하고 실천하려는 유토피아의 사고는 마치 섬에서 외롭게 목숨을 부지하는 로빈손 크루소처럼 출구 없는 아포리아에 갇히고 말았다는 게 보러의 견해입니다. (Bohrer: 76).

 

요약하건대 벤야민은 역사적 유물론에 대해 회의감을 표명했으나, 이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렸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벤야민이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 마르크스주의와 혁명 예술을 비판했는가를 명확하게 재단하기란 어렵습니다. 왜냐면 그는 루카치의 신-고전주의의 예술적 경향을 비판하지만, 피스카도어 그리고 브레히트의 자본주의 비판에 근거한 예술적 실험성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최문규가 벤야민에게서 “유연한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측면”이 발견된다고 지적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최문규: 58). 그렇지만 최문규의 관심사는 근본적으로 “예술의 정치화”가 아니라, “정치의 예술화”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둘째로 최문규가 벤야민에게서 발견하려고 하는 것은 오로지 역사성을 파기한 이후에 발견되는 “심미성”입니다. 벤야민은 최문규에게는 “사물의 조각, 아포리즘 그리고 이미지적 사유”를 찾아내는 놀라운 “심미적 비평가”일 뿐입니다. (최문규: 79). 이로써 그는 벤야민의 이론에다 변증법적 가치가 배제된 반동적 유미주의를 덧칠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최문규가 벤야민에게서 도출하려는 것은 무엇보다도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에서 발견되는 미적 요소이고, 순수 예술의 반동적 유미주의며, 제반 사항들을 폐쇄적으로 철저히 구분하려는 체제 옹호주의입니다. 순수 예술은 문화의 제반 영역을 구분하고 폐쇄적으로 차단함으로써,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반-정치적 성향을 퍼뜨립니다. 과연 아름다움의 파편 속에는 사회의 긍정적 변화를 위한 순간적 갈망이 얼마나 강하게 자리할 수 있을까요?

 

벤야민의 이론에서 사회 변화를 촉구하는 변증법이 배제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최문규는 루카치를 비판한 블로흐의 실험적 미학을 한 번도 본격적으로 구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변증법적 생산 미학을 추구한 마르크스주의 연구가, 이를테면 한스 마이어Hans Mayer 그리고 피에르 마슈레Pierre Macherey 등의 사회주의 예술에서도 가능한 실험적 시도 등을 아예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블로흐는 예술이 근본적으로 “고유한 무엇에 대한 암호”를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Bloch, PH: 233). 이는 주어진 세계가 아직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예술적 대상을 단편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다는 블로흐의 지론을 반영한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은 묘하게도 벤야민의 예술관과 묘한 공통점을 보여줍니다. 요약하건대 벤야민은 심미성을 추구하는 순수 미학 연구자라기보다는, 한걸음 더 나아가 변증법과 새로운 생산 미학을 중시하는 비평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예술적 방식, 획기적인 표현 방법, 참신한 실험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인 자는 바로 벤야민이었습니다. 재차 말씀드리건대 벤야민이 시도한 신학적 예술적 은유의 시도는 문학과 예술의 확정된 이론 내지는 견해와는 별개로 파악되어야 할 것입니다.

 

(5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