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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저 소개) 완강함 속의 부드러움. 홍세화의『결: 거칢에 대하여』

필자 (匹子) 2024. 4. 19. 19:37

2020년에 간행된 홍세화의 『결: 거칢에 대하여』 (한겨레 출판 2021)는 단순히 시대 비평을 넘어서, 인간 홍세화의 내적 성찰을 진솔하게 담고 있는 책입니다. 작가는 지금까지 프랑스와 한국에서 때로는 노동자로, 때로는 지식인으로 살아왔습니다. 국가보안법 그리고 반공법은 1970년대에 많은 사람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남민전”이라는 정치적 사건은 그를 20년 동안 프랑스에서 망명 아닌 망명 생활을 보내게 했습니다. 귀국 후에 홍세화는 자신의 글과 칼럼을 공개했는데, 이는 많은 사람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언젠가 독일의 시인, 볼프 비어만은 서독으로 연주 여행을 떠났는데, 동독은 그의 입국을 거부했습니다. 망명 아닌 망명 작가가 된 그는 다음과 같이 일갈했습니다. “추방당한 자에 대한 차단은 작가에게는 유치장의 구금보다도 더욱 끔찍한 형벌이다.Das Aussperren ist den Dichtern gegenüber viel schlimmere Bestrafungen als das Einsperren.” 곰곰이 생각하면 유치장은 지식인의 자유를 옥죄입니다. 그래도 영어(囹圄)의 삶은 최소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글을 쓰게 작용합니다. 그러나 해외 망명은 이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낯선 지역에서의 소통할 수 없는 외로움 그리고 생계를 위해 원치 않는 노동을 해야 한다는 괴로움이 해외 망명자의 마음을 오랫동안 짓누르게 됩니다. 글을 쓸 시간도 없고, 자신의 글을 읽어주는 독자 또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본에 체류하는 예술 비평가, 서경식은 망명작가를 “언어의 감옥에 갇힌 수인(囚人)”이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망명 작가에게는 창작의 욕구를 앗아가고 생계를 이어가기 힘들게 하는 것이 바로 해외망명이지요. 본의 아니게 해외로 떠나야 하는 삶을 경험해보지 못한 분은 이러한 사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가 발표한 책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은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은 가른다』(한겨레 출판, 2008)입니다. 이 책은 수많은 유럽 문화의 소개서 내지는 비평서 가운데 가장 탁월한 입문서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실제로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서 한국 문화가 유럽 문화보다 우월하지도 열등하지도 않으며, 오로지 다를 뿐이라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은 필자에게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햇빛 1988)을 접했을 때만큼 강렬한 감동을 안겨주었습니다.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이라는 끔찍한 폭력은 지식인 한 사람을 감방으로 집어넣었고, 다른 한 사람을 타국으로 쫓아내도록 작용했던 것입니다. 저자는 파리에서 택시 운전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고, 이 와중에서 프랑스 노동 운동과 프랑스의 자유분방한 사회적 분위기를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습득하고 배워나갔습니다. 이러한 삶의 체험은 그로 하여금 한국 사회를 이방인의 눈으로 공정하고도 객관적으로 고찰하게 하는 놀라운 자양이자 무기가 되었습니다.

 

2020년에 발표된 『결: 거칢에 대하여』는 저자가 어째서 자신이 “거칠게” 글을 써왔는지를 밝히고, 시대 그리고 한 개인의 입장과 자세를 정리한 고백의 저서입니다. 홍세화는 지금까지 자신의 글을 통해서 가장 강조한 것은 신자유주의로 인한 자본의 폭력과 이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저항의식이었습니다. 지금도 한국 사회에서는 수많은 분이 프레카리아트, 즉 불안정한 노동자, 실업자, 노숙자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건강과 미래를 걱정할 겨를조차 주어지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한국 사회는 그야말로 폭력의 지뢰밭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 개인이 인간적 존엄성을 지키고 자신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되돌려받을 수 있는 무엇일까요? 과연 무엇이 주어진 현재에서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이룩할 수 있는 방책일까요? 이러한 물음이 말로 오래전부터 저자가 심혈을 기울여 고뇌하고 추적한 과제였습니다. 이러한 물음은 가장 중요한 사회적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일개 노동자가 거대한 기업의 횡포 속에서 핍박당하고 목숨을 잃는 일은 비일비재하게 나타나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이번의 책 역시 마치 조지 오웰의 『1984년』에 묘사되고 있듯이 20대 80으로 요약되는 특권층과 프레카리아트의 상황을 자세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저자는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상징 폭력”과의 관련성을 언급합니다. 가진 자가 서로 야합하면, 이는 공공질서로 합법화됩니다. 이에 반해 가지지 못한 자가 야합하면, 이는 한국 사회에서는 사회 질서를 깨뜨리는 폭력으로 수용됩니다. 이러한 성향이 바로 “상징 권력의 폭력Violence du pouvoir symbolique”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징 폭력에 맞서서 싸우는 일이야말로 노동 운동의 방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면 사회가 제아무리 권위적인 검찰 국가로 돌변한다고 하더라도 노동자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기본권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밖에 저자는 지역주의의 문제, 한국 사회의 특권층에 대해 누구보다도 예리한 메스를 가해 왔습니다. 저자는 특히 한국 사회의 가장 뿌리 깊게 박혀 있는 특권층의 정경 유착, SKY 출신자들의 이기적인 담합 등에 관해서 신랄하게 고발해 왔습니다. 한국인의 삶이 정말로 탈권위적이고 민주적으로 거듭나려면, 국가, 대기업, 사장, 남자, 기성세대가 개개인, 직장인, 사원, 여자 그리고 젊은 세대의 상부에 군림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저자 홍세화 자신이 서울대 출신이면서도 서울대의 특권 의식을 비판하고, 이로부터 스스로 거리감을 취해왔다는 사실입니다. 나아가 그는 마치 고인 물처럼 썩어 있는 한국 언론의 실상을 정확하게 비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글들이 독자들에게 설득력을 얻게 되는 것은 홍세화의 비판적 화살이 보수언론 뿐 아니라, 진보를 표방하는 언론과 방송으로 향하기 때문입니다. 자신 역시 비판 속에 포함(包涵)되어 있다는 것은 비판과 자기 비판이 공히 자리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번의 책에는 자신의 삶과 자신의 사고가 서로 어우러져 있는 글들이 많이 실려 있습니다. 홍세화는 자유, 몸, 평등 설득 등에 관해서 서술하면서, 자기 자신을 끝없이 성찰하고 반성해 나가는 태도를 책에 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저자 특유의 솔직함과 겸허함을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사항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다음과 같은 말입니다. “인간은 문제가 출현할 때 생겨난 방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Problems can never be solved with the same mindset that created them.” 이는 물리학에서만 통용되는 방언이 아닙니다.

 

어떤 문제에 크고 작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으면, 우리는 주어진 문제를 객관적으로 그리고 공명정대하게 고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홍세화 선생님은 난민으로서의 시각을 동원하여 한국 사회의 제반 문제점을 가장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고찰하려고 했습니다. 『결: 거칢에 대하여』를 읽으면서 필자는 느낀 게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저자의 마음속에 도사린 완강함 속의 인간적 부드러움입니다. 적어도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세밀하고 꼼꼼하게 독서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거칠지 않습니다.

 

본서를 읽으면서 필자는 두 가지 자그마한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그 하나는 시대를 고찰하는 시각 자체가 남성 중심적이라는 점입니다. 혹자는 남성더러 여성의 시각을 견지하라고 강권하는 것이 너무 가혹하지 않는가? 하고 항변할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오늘날의 사회적 문제는 성 그리고 성의 차이로 인해 나타나는 심리적 갈등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감안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필자를 포함한 남성들 모두가 태어날 때부터 습득한 남성적 오만함이라는 무의식적 습관의 의식을 접고, 여성의 눈을 빌려 세상을 고찰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사항은 저자가 생태계 문제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할애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인간의 삶에서 먹고 살아가는 문제가 가장 시급한 것이 사실이지만, 인류의 미래는 생태계 문제와 직결되지 않는가요?

 

한국의 대통령은 수없이 자유를 외칩니다. 그런데 자유에 돈이 개입된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으면, 자유는 그야말로 추상적이고 공허한 구호에 불과할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돈이 동반되지 않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가진 자에게 국한되는 자유임을 뜻합니다. 그것은 일부 사회 구성원의 자유이지요. 진정한 자유에는 필연적으로 경제적 평등이라는 부속물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정치는 돈을 의식할 필요가 없는 부유층을 위해서 행해져야 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돈 때문에 인간의 기본적 도리조차도 무시하며 살아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을 도모하는 노력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홍세화 선생님이 추구하는 장발장 은행이라는 꽃이 척박한 독점 자본주의의 토양에서 찬란하게 만개하여 뜻깊은 결실을 이룩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