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 1721 - 1804)의 「어느 환시자의 꿈. 형이상학의 꿈에 의한 해명 (Träume eines Geistersehers, erläutert durch Träume der Metaphysik)」은 1766년에 간행되었다. 이는 칸트의 놀라운 기지를 발휘한 풍자의 글이다. 여기서 칸트는 엠마누엘 스웨덴보리 (E. Swedenborg)의 심령주의를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나아가 독일의 철학자 크리스티안 볼프 (Chr. Wolff)와 그의 추종자들의 합리주의 사상 역시 논제로 나타난다. 스웨덴보리와 그의 추종자들은 심령적인 방법으로써 영혼의 세계를 투시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과연 철학자는 정신과 영혼 세계의 신비로운 영역을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게 칸트가 제기한 물음이었다.
“철학자는 근본적으로 무엇을 내세울 수 있으며, 무엇을 반박할 수 있는가? 그는 이러한 신비로운 이야기에 대해 단 한가지만을 가능할지 모른다고 용인해야 할까?” 아니면 “그따위 우스꽝스럽고도 한가로운 질문에 대해 아예 언급하지 말고, 유용한 문제만을 고수”하며, 논의를 끝내야 할까? 신비로운 영혼의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칸트는 환시자, 스웨덴보리의 꿈들 그리고 크리스티안 볼프의 형이상학적 꿈 사이에 도사린 어떤 기이한 평행선을 기억해낸다.
“독단론에 해당하는 첫 번째 단락”은 형이상학적인 일면을 다루고 있다. 칸트는 사람들이 흔히 “영혼”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게 과연 무엇인지 묻는다. 영혼들이란 물질적인 게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가능한 무엇인가, 아니면, 실제 현실에 존재하는가? 칸트 “자신의 입장은 이 세상에는 비물질적인 존재가 존재할 수 있”는 쪽으로 기우는데, 칸트는 가령 “나의 영혼은 이러한 본질의 공간 속에 예속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문제는 학문적으로 검증될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행여나 우리의 견해가 반박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내지 이성의 토대로 상대방의 견해를 반박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등을 지니지 않은 채” 영혼의 존재를 상상할 수 있다고 한다. (첫 번째 부분).
만약 영혼이 존재한다면, 그것들은 “아마도 서로 모여서” 비물질적 세계라고 명명될 수 있는, “어떤 거대한 전체를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지 모른다. 아닌 게 아니라 “보편적 의지의 규칙”은 이와 매우 근친하다. 인간은 실제로 가장 비밀스러운 동인 속에서 그러한 규칙에 의존되어 있지 않는가? 그렇지만 우리 인간은 주위 환경 속에서 진정한 것과 거친 가상적 존재를 서로 구분하지 못한다. 과연 어떠한 이유에서 영혼의 공동체는 전체적으로 보편적인 무엇 내지 일상적인 무엇 등과 같은 특성을 지니지 못하는가?
인간의 상상은 영혼적 존재를 다만 항상 유추와 상상 행위를 통해서만이 재현시킬 수 있다. “사람들이 과연 다른 세계를 어떻게 직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을까? 그것은 오로지 현재에 꼭 필요한 오성의 능력 가운데 일부를 상실함으로써 이룩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철학자는 영혼의 존재에 대해 옳고 그름의 판단을 내릴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두 번째 부분)
그렇지만 오성을 꿈꾸는 자들, 즉 형이상학을 연구하는 자들은 감성을 통해 꿈꾸는 자들의 사실들을 그대로 다루고 있다. 그들은 많은 사상의 세계를 떠돌아다닐 수 있는 풍선을 만드는 장인들이다. 바로 그러한 가상적 영역 속에서 타인의 주장을 배척하고 자신의 고유한 주장을 개진하는 사람들이 이른바 형이상학자들이다. 다른 한편 몽상가들 역시 일상인들이 간파하지 못하는 그러한 무엇을 발견하여 바라본다. 그들은 한마디로 여러 가지 몽상에 내맡겨져 있다. 어떤 사실이 거짓으로 판명될 경우 그들은 몹시 당황해 하며, 가상을 가상으로 용인하지만, 가상이 사실로 드러날 수 있는 개연성에 대해서는 결코 굴복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칸트는 다음의 사항을 권고한다. 즉 “이성은 한편으로는 우리의 상상을 자극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상상을 차단시킨다. 따라서 우리는 이성의 그러한 현혹적인 특성에 전적으로 동의해서는 안 된다”.(세 번째 부분) 상기한 태도야 말로 “건강한 회의”라고 일컬을 수 있는 학문 행위의 지혜일 것이다. 영혼에 관한 이야기는 결코 진리의 내용을 모조리 드러내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은 그러한 이야기를 전적으로 허황된 것이라고 내팽개쳐서는 안 된다. (네 번째 부분)
“역사에 해당하는 두 번째 단락”은 스웨덴보리의 입장을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다. 칸트는 영혼의 존재에 관한 스웨덴보리의 서술을 다룬다. 여기서 스웨덴보리는 세상에서 가장 처음으로 영혼의 존재에 관해 세밀하게 기술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스웨덴보리의 예견의 기술은 칸트의 견해에 의하면 이성의 가상적 측면만큼 전적으로 신뢰받을 수 없는 무엇이다. 칸트는 한편으로는 볼프의 “이성의 가상적 측면”, 다른 한편으로는 스웨덴보리의 “영혼을 예견하는 기술” 모두를 거부하는 대신에, 자신의 독특한 비판적 오성을 중시하고 있다.
칸트의 말을 인용해보기로 하자. “나는 다음의 사항을 믿지 않는다. 즉 어떤 애착이라든가 무언가를 시험하기 전에 마음속에 미리 잠입해 들어온 나의 정서가 이러저러한 이유들을 바탕으로 하여 찬성과 반대에 대한 나의 판단 능력과 조종능력을 빼앗아 버린다고 말이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오로지 하나의 예외가 존재한다. 즉 이성의 천칭은 결코 양쪽에 대해 공평하지가 않다. 오히려 ‘미래의 희망’이라고 씌어진 한쪽이 자동적으로 유리하기 마련이다.
미래의 희망에 해당하는 천칭의 접시는 -비록 그게 원래보다 약간 가볍다고 하더라도- 보다 큰 무게가 실려 있을 것같이 느껴지는 다른 쪽의 접시를 들어 올리도록 교묘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이성의) 유일한 오류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러한 오류를 결코 파기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실제로 한번이라도 파기하려고 의도하지 않는다.”
철두철미할 정도로 이성을 중시한 칸트 역시도 인간의 이성 속에 도사린 일말의 희망의 요소를 부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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