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문학 이론

서로박: 샤로트의 '불신의 시대'

필자 (匹子) 2023. 12. 16. 11:21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나탈리 사로트 (N. Sarraute, 1902 -)의 "불신의 시대 (L’Ére du soupçon)"는 1956년 파리에서 처음으로 간행되었다. 사로트의 에세이 모음집은 로브-그리예 (Robbe-Grillet)의 누보로망 예찬론 외에 누보로망의 이론적 근거를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문헌이다. 사로트 역시 누보로망의 작가에 속한다. 물론 사로트는 초창기의 급진적인 로브-그리예와는 달리 근본적으로 제반 심리학에 대해 반감을 표출한 바 있다. 그미는 의식의 한계를 벗어난, 미세한 간주관적 (間主觀的)인 영혼의 드라마를 형상화했다.

 

오늘날 장편 소설 작가는 확정된 인물 그리고 작품내의 여러 가지 행위의 개연성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 또한 프루스트, 조이스, 프로이트 등은 독자에게 그런 식으로 계몽시켰다. 따라서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언어, 눈길, 제스처 등에 의해 야기되는 두려움을 전의식속에 관련시키도록 조처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해체되어야 하는 것은 작중 인물의 “성격” 그리고 “행위”이다. 전통적 방식으로서의 등장인물의 성격 고수 그리고 상투적 사건 진행은 현대에 이르러 더 이상 효력을 떨치지 못한다. 나아가 작가는 현재 시제를 과감히 사용하며, “단순한 그림”을 묘사하기도 한다. 작가는 이로써 자신을 숨기면서 언어보다 앞선 자극적 그림을 독자에게 제시할 수 있다.

 

 

소련 출신인 사로트는 수많은 작품 주제의 범례로서 도스토예프스키를 꼽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예컨대 등장인물의 무도병 (舞蹈病, Veitstanz), 주위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기이한 내적 흥분 등을 묘사한다. 이러한 흥분은 말하자면 섬세하고 미묘한 대화 내용이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는 데서 비롯한다. 물론 여기서 문제시되는 것은 대화의 저변에 깔려 있는 전의식의 내용, 다시 말해 “하부의 대화 sous-conversation”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등장인물로 하여금 대화와 의식을 오가면서 영혼의 곡예를 벌리게 하였다. 또한 사로트는 동시대의 영국 여류 작가 컴톤-버네트 (Compton-Burnett)의 환각 상태의 끝없는 서술을 높이 평가한다. 컴톤 버네트의 서술 대화는 자신의 서술적 심리적 상상이 현대적으로 실현된 결과라는 것이다.

 

에세이 모음집의 마지막 논문에서 사로트는 자신의 리얼리즘 개념을 정식화하고 있다. 그미는 어떤 무비판적인 독자들의 부화뇌동하는 태도를 은근히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그러니까 일반 독자들이 좋아하는 것은 사로트에 의하면 결코 작품의 수준 내지 깊이가 아니다. 예컨대 사람들은 마르셀 프루스트를 잘못 수용했다고 한다. 프루스트 문학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프루스트의 문학적 현실에 친숙해 있기 때문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막연히 동질성을 느낀다. 다시 말해 그들은 사로트에 의하면 프루스트의 문학적 주제를 면밀히 고찰하는 게 아니라, 소설에 드러난 피상적 현실의 내용만을 마냥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현대에는 사로트에 의하면 엉터리 작가들이 온존하고 있다. 이들은 전통적으로 조건화된 독자의 기대 지평만을 의식하며, 독자들과 성스럽지 못한 공모 관계를 맺곤 한다. 사로트는 바로 이러한 작가들을 “형식주의자”로 지칭한다. 왜냐면 그들은 작품 구도 내지 표현에 있어서 전통적인 전근대적 방법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면 진정한 리얼리즘 작가는 문학적 선입견과 확정된 상을 타파하고, 어떤 알려지지 않은 무엇, 현실의 작은 새로운 부분을 발견하려고 애쓴다. 비록 미세하지만 참신하고 깊이 있는 현실상 - 바로 그것이 작가가 추적해야 할 고유의 영역이라고 한다.

 

진정한 리얼리스트는 문체 내지는 탁월한 기량만을 위해서 애쓰는 사람이 아니다. 문체란 다만 어떤 새로운 현실을 추출해내는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더 이상 발자크와 같은 과거의 전통적 리얼리즘의 틀을 고수할 필요는 없다. 한마디로 말해 혁신적 리얼리즘을 위한 건강한 모태는 샤로트에 의하면 바로 “의심” 내지는 “의혹”이다. 작가가 경계해야 할 태도는 무엇보다도 (독자가 맹목적으로 획득하려고 하는) 편안함이며, 불신 내지 의혹과는 거리가 멀다. 문학은 오로지 개개인의 비순응적 자세 그리고 강박적 저항 정신의 의해서 기대할 수 있다. 사로트의 이러한 발언은 참여 문학의 지평을 확장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