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알림 (명저)

(명저 소개) 이종찬의 (2) '파리식물원에서 데지마박물관까지'

필자 (匹子) 2023. 12. 10. 09:30

(앞에서 계속됩니다.)

 

7. 조선은 서양의 문물, 특히 과학 기술과 의학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이러한 것들은 무인(武人) 그리고 중인(中人)인들이 관여하는 ”천박한“ 내용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종찬 교수님은 한국의 자연 과학의 역사를 논하면서, 조선의 의사, 허준을 언급합니다. 허준은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집필할 때 이시진의 『본초강목本草綱目』을 세부적으로 참고하지 않았습니다. 『본초강목』에 소개된 수많은 약초의 가치에 매료된 사람들은 놀랍게도 유럽의 상인들이었습니다. 이시진의 『본초강목』은 서양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종의 기원을 쓴 다윈은 이시진의 책을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식물학자 다윈은 이시진의 문헌이 자연의 선택을 명확하게 지적하였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254쪽)

 

상기한 내용을 고려한다면, 『동의보감』은 기본적으로 “사대부를 위한 의서“였습니다. (96쪽) 예컨대 『동의보감』의 신형장부도에는 사람의 손과 발이 아예 생략되어 있습니다. 팔과 다리 그리고 머리와 몸통은 그려져 있으나, 손과 발은 빠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손과 발은 허준에 의하면 건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몸의 일부라는 것이었을까요? 물론 손과 발이 잘려 나가고 인간은 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신체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일부인데, 어째서 신형장부도에는 손과 발이 그려져 있지 않는 것일까요? 이종찬 교수님은 다음과 같이 논평합니다. ”허준으로 상징되는 조선 사대부들은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인간, 다시 말해서 노동하는 인간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 그들은 오장육부가 생리적으로 제대로 작동하려면 팔과 다리의 노동력이 일차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무시하였다.“ (96쪽)

 

8. 그렇다면 조선의 사대부는 어떠한 이유에서 인간의 노동력을 무시했을까요? 어째서 조선의 사회는 회화 예술과 건축 예술을 등한시하였으며, 서양 의학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그렇게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을까요? 이는 이종찬 교수에 의하면 성리학이라는 유교의 풍토 때문이라고 합니다. 노동은 성리학에 의하면 천민이나 노예가 행하는 일감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오늘날에도 이러한 유교주의의 폐습이 사회 곳곳에 잔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령 과학 기술을 천시하거나, 이를 인문학과 무관하게 고찰하는 학문적 폐쇄주의의 풍토는 안타깝게도 오늘날에도 그대로 전승되고 있습니다.

 

이종찬 교수는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하멜 일행처럼 네덜란드 사람으로서 조선에 표류되었다가 귀화한 박연 (벨데브레)과 하멜 일행의 만남에서부터 시작되는 김경욱의 소설 『천년의 왕국』은 네덜란드와 조선의 어긋난 만남을 읽을 수 있는 텍스트이다. 하지만 소설가는 박연이 보유했던 네덜란드의 기술과학에 대해선 어떤 이야기도 늘어놓지 않는다. 김훈의 『남한산성』을 포함하여 한국의 역사소설은 도무지 조선의 기술과학에 털끝만큼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다.“ (197쪽)

 

9. 이종찬 교수의 지적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합니다. 소설 『천년의 왕국』은 네덜란드 사람인 하멜 (박연)이 표류하다가 한국에 서 겪었던 외국인의 삶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박연의 본명은 얀 야너스 벨테브레. 1595년생으로 네덜란드 사람입니다. 1627년 네덜란드 상선을 타고 바타비아(자카르타)를 출발해 나가사키로 가던 도중 폭풍에 휘말려 제주도에 표착했습니다. 그는 동료 선원 2명과 조선 관원들에게 붙들려 한양으로 압송됩니다. 26년 뒤 모국 네덜란드의 선원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류해왔을 때 그는 한양에서 내려와 통역을 맡았기도 했습니다. 그가 언제 죽었는지에 관해서는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함께 조선에 왔던 동료 2명과 벨테브레가 동시에 등장하는 기록은 '하멜 표류기'가 유일합니다. 작가는 박연이라는 인물이 타국에서 겪었던 이방인의 삶 그리고 소외감 등을 집중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김훈의 『남한산성』 은 병자호란 당시에 인조가 남한산성에 피신하던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조정에서는 명분과 실익 사이의 갈등만이 문제가 되고, 주화파와 척화파 사이의 대립만이 하나의 탁상공론으로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는 과학 기술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발견되지 않습니다.

 

10. 어째서 일본은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학문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부강하게 되었지만, 조선은 그렇지 못하고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을까요? 이종찬 교수는 그것이 새로운 문물에 대해 거부감을 취하는 사대부들의 허례허식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심지어는 실학을 중시하는 박제가, 유형원, 이익, 박지원, 정약용, 홍대용, 최한기 모두 중국 청나라의 지평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북경을 통해 유럽의 문물에 눈뜨게 되었지만, 성리학적 감각의 질서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서구 문물이 눈에 들어왔다.“ (199쪽) 조선 시대의 실학자들은 그저 청나라에 들어온 문물만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네덜란드인들의 의학 그리고 조총을 만드는 기술에 대해서 탐탁자 않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이를테면 해외로 표류하여 오키나와, 마카오 그리고 중국 본토를 접했던 문순득의 체험을 경시했을 뿐입니다. 문순득은 세상에 얼마나 많은 기이한 사람들과 동식물 그리고 물품들이 존재하는지 세부적으로 언급했지만, 이를 경청한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11. 또 한 가지 지적해야 할 사항은 그림과 건축물에 관한 무관심입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지도, 구체적으로 그려진 식물도감 등을 철저하게 경시했습니다. 예컨대 정약전은 『현산어보(玆山魚譜)』를 집필하면서, 그림으로 된 해족도설(海族圖說)을 구상했습니다. 그런데 동생 정약용은 형의 계획을 말렸다고 합니다. 이는 그림에 대한 정약용의 불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림이야말로 모든 것을 일목요연하게 지적할 수 있는 수단이 아닙니까? 독일어로 "Ich bin im Bilde."라는 문장은 "나는 모든 것을 훤히 꿰뚫고 있어."라는 뜻이 아닙니까? 독일의 Duden 사전 가운데 제3권 Bildwoerterbuch 가 있습니다. 이 사전에는 모든 사물이 그림에 의해 표기되어 있고, 여기에 명칭이 곁들여 있습니다. 네덜란드 라이덴에 있는 지볼트 박물관에는 일본의 박물학자이자 의사였던 이토 게이스케(伊藤圭介)의 식물도감이 비치되어 있습니다. 지볼트는 일본으로 가서 그곳의 동식물과 지리에 관한 구체적인 자료를 수집하여 1835년에 『일본의 식물상』이라는 책을 간행했습니다. 거기에는 온갖 식물 표본이 그림으로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215쪽)

 

12. 요약하건대 사대부들은 장영실의 과학 기술이 기껏해야 (양반이 아닌) 중인(中人)들이 행하는 천박한 일감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정약용은 머리로만 실학을 생각했지만, 실학을 실천하는 길을 모색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반해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서양의 문물을 난학(蘭學)으로 규정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습니다. 이는 결국 일본의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졌고, 조선은 유교의 낙후된 폐쇄성을 떨치지 못하게 작용합니다. 과학 기술과 의학에 대한 조선 시대 사대부들의 무관심과 조롱은 결국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로 화하게 한 결정적 이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령 김용옥은 자신의 독기학설을 통해서 조선시대의 실학은 실용의 학문이 아니라, 실심(實心)의 학문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생명 평화 아시아 기획: 한국 생명 사상의 뿌리를 찾아서, 도서출판 창 2021, 22)

 

한국인들은 세상을 돌아다니는 일을 ”역마살이 끼어 있다.“고 말하면서, 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216쪽) 그러나 지구화 시대에 역마살은 누구나 갖추어야 할 덕목인지 모릅니다. 언젠가 독일의 작가 하이너 뮐러는 평범한 사람들을 ”부동산업자“에 비유하고 지식인을 ”유대인 상인“으로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유대인 재단사는 칼과 자 그리고 가위만 가지고, 세상을 떠돌아다닙니다. 그에게 부동산은 짊어지고 다닐 수 없는 부동(不動)의 재산처럼 거추장스러울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지식인은 뮐러에 의하면 마치 유대인처럼 방랑하는 자라고 합니다. 왜냐면 새로운 무엇을 찾아서 그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서 유목의 삶을 마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지식은 도서관에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처음으로 마주치는 인간과 물품 그리고 새로운 지리적 환경 속에서 예리하게 발견될 수 있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