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근대독문헌

서로박: (1) 레싱의 '현인 나탄'

필자 (匹子) 2023. 10. 24. 16:43

친애하는 J, 당신의 임이 어느 순간 당신과 남매지간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면, 당신의 마음속에 어떠한 느낌이 들까요? 적어도 당신이 젊은이라면, 당신의 열정이 마치 김빠진 맥주처럼 일순간에 허망하게 사라지는 것을 감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혈연지정은 어느 종교에서든 간에 애정보다 우선적인 관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부는 헤어지면 남이 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남이 될 수 없는 관계가 부모와 자식 간의 그리고 남매 사이의 관계가 아닌가요? 어쩌면 애정관계와 혈연관계는 동질적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하나이니까요. 레싱은 현인 나탄 Nathan der Weise에서 이 점을 강조하려고 했는지 모릅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망각해서는 안 될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계몽주의의 정신입니다. 계몽주의는 인간의 고유한 자유와 개별적 가치를 인정하는 사상입니다. 따라서 계몽된 인간은 어떠한 종교적 교리의 노예일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러한 말을 자연스럽게 발설할 수 있지만, 18세기 말 유럽에서는 이러한 입장은 종교의 권위를 무시하는 천인공노할 자세로 취급 받았습니다.

 

실제로 기원후 8세기에서 11세기에 이슬람의 문화는 찬란하게 꽃을 피웠지만, 이와 병행하여 이슬람 독단론이 모든 사람들의 삶을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자유로운 사상을 추구하는 위대한 아비켄나 그리고 아베로에스는 편안하게 살아갈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들의 철학서적들은 종교의 교리와 위배된다는 이유로 모조리 불타서 사라졌습니다. 오늘날에도 이슬람 국가에서 종교적 관용을 주장하는 사람은 총살당하거나 죽임을 면치 못하는 형국입니다.

 

현인 나탄 1779년에 탈고되어, 1783 4 14일에 베를린에서 초연된 제 5막의 극작품입니다. 레싱은 볼펜뷔텔 도서관장으로 일할 때 자무엘 라이마루스 (1694 - 1768)의 독단적 종교에 대한 비판적 글을 익명으로 간행하였습니다. (비록 도서관장이라고 하지만, 레싱은 정기적으로 월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레싱은 독일문학 최초의 전업 작가에 해당합니다.) 18세기의 북부 독일에서는 루터 교회 외에는 다른 종파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계몽주의를 추구하는 작가로서 레싱은 종교의 독단론을 비판하지 않고는 어떠한 자유사상도 만개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익명의 글을 발표하게 된 것입니다. 함부르크의 목사인 요한 멜히오르 괴체 등은 1777년에 레싱의 서적을 맹렬히 비판하였습니다. 괴체는 자유로운 정신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종교적 믿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신앙이지, 자유로운 정신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괴체는 종교적 관용을 부르짖는 레싱과 같은 극작가를 탄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레싱은 라이마루스의 문헌을 통해서 괴체의 입장을 더 이상 노골적으로 비판할 수 없게 되자, 한편으로는 반 괴체 Anti-Goetze (1778/79)를 집필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극작품 현인 나탄을 집필하였습니다.

 

 

 

 

현인 나탄의 동상

 

 레싱은 5각운의 “약강격 Jambus”을 사용하였습니다. 약강격은 극작품에서 잘 사용되지 않는 표현 방법인데, 레싱에 의해서 과감하게 활용되었으며, 나중에 「돈 카를로스」, 「이피게니에」 그리고 「발렌슈타인」의 무운격이 독일 극작품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습니다. 구조상으로도 「현인 나탄」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작품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같이 분석 극의 특징을 지닙니다. 왜냐하면 스토리의 내용이 처음에는 잘 알려지지 않다가, 사건의 진행과 병행하여 감추어진 사실이 나중에야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극적 장소는 세계 종교의 도시인 예루살렘이요, 극적 시간은 십자군 전쟁 당시입니다. 그때 그곳에서 기독교,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교가 모두 만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