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근대독문헌

서로박: 실러의 서정시 연구 경향

필자 (匹子) 2023. 7. 25. 09:59

어떤 문학적 장르도 서정시만큼 역사적 진보에 대해 저항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왜냐면 서정시는 다른 장르에 비해 시대의 현실적 조건에 직접적으로 결착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서정시의 연구에 있어서 방법론적 유행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시대에는 개별적 시, 개별 연, 구절, 상 등을 집요하게 연구했는가 하면, 어떤 시대에는 연구가들이 작품 내재적이자 미세 분석을 거부하기도 했다.

 

가령 실러의 시는 (H. Cysarz에 의하면) “결코 소진되지 않는 분수”이며, 독일 시의 언어상의 깊이를 포괄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벤노 폰 비제 (B. v. Wiese)는 실러의 시를 이해하려면 단어 하나하나 음절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는 정밀한 미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실러의 시는 (E. Middell의 견해에 의하면) “새로운 부르주아의 현실을 시적으로 전유하는” 노력의 표현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특정한 방법론적인 입장들은 “가장 시적인 시”를 이해하는 데 완전한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 학문적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은 시대의 사람들은 시의 지속적 효용성을 검증해 보지도 않은 채 “분위기에 의존하여” 시를 해석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동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시의 이론을 전혀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후세 사람들에 비해 시인을 보다 정확히 이해했으며, 비교적 정확히 평가하기도 했다.

 

수 백년 동안 지속된 실러의 시 연구는 상기한 이유에서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의 해석에 많이 의존되고 있다. 물론 개별 연구에 있어서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가령 「크세니엔 (Xenien)」은 괴테의 작품이 아니라, 실러의 작품이라는 점, 「이비루스의 두루미들 (Die Kraniche des Ibyrus)」는 실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구와 함께 나타난 것이라는 점, 「기계 망치의 걸음 (Der Gang nach dem Eisenhammer)」은 오직 문명에 대한 아이러니로 받아들일 때 정확하게 이해될 수 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영국의 제임스 와트가 1768년에 증기기관차를 발명했을 때, 실러의 나이는 불과 9세였다. 당시에는 신문이 없었으므로, 10년 뒤에야 실러는 증기 기관차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로써 실러의 시에 대해 현대 독자들이 많이 근접했다고 말할 수 없다. 실러 연구는 오로지 실러 시의 현대적 의미에 의해서 획득될 수 있지만, 이로써 역사적 거리감을 떨치지는 못했다. 문제는 역사에 대한 관심 자체가 아니라, 역사적 의식이다. 과거에 무엇이 왜 있었고, 어째서 특정한 무엇이 가치를 인정받았는가? 하는 역사적 시각을 견지하는 게 중요하다.

 

비평에 대한 비평은 실러의 시를 논할 때 항상 가능하다. 훔볼트는 실러의 대부분 시를 전적으로 찬양했고, 슐레겔은 실러의 시를 수준 이하로 평가하였다. 이에 대한 비판 역시 가능하다. 괴테는 실러에 대하여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괴테는 실러에 대한 비평문을 읽으면서, 상당히 많은 이득 (정신적 자양)을 얻기도 했다. 가령 그가 실러에게 보낸 편지 (1797년 5월 17일, 1795년 10월 6일)에서 훔볼트와 슐레겔을 언급하였다. 괴테는 실러의 시를 “직관과 추상성을 기이하게 결합시키”고 있다고 평가했다. 괴테는 시가 도덕적 요소를 수용하는 데 동의했지만, 시의 영역이 윤리의 영역에 편입되는 것을 완강히 부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