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근대독문헌

서로박: 괴테의 '스텔라'

필자 (匹子) 2023. 8. 30. 18:23

 

 

 

친애하는 J, 오늘은 괴테 (1749 - 1832)의 극작품 「스텔라」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5막 극으로 이루어진 괴테의 작품은 1775년에 완성되어 이듬해인 1776년에 함부르크의 국립극장에서 처음으로 공연되었습니다. 괴테는 나중에, 1805년에 제 2원고를 집필하였으며, 1816년에 이르러 바이마르 궁정 국장에서 처음으로 공연하게 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대부분의 괴테 작품과는 달리 동시대 사람들 그리고 문학 사가들에 의해서 혹독하게 비판당했습니다. 특히 제 1원고는 18세기 독일의 도덕적 가치를 훼손한다는 이유로 공연금지 조처를 받았습니다. 작품에 대한 비판은 후세에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가령 1952년 독일의 독문학자 에밀 슈타이거 Emil Staiger는 괴테의 전기에서 극작품 「스텔라」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습니다. “구조적으로 매우 원시적이고, 모티프에 있어서 명징함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접근하기가 어렵다. 대화가 제대로 원활하게 이어지지 않으며, 첨예하지 못하고 빈약한 사고를 드러내고 있다.” 괴테는 시민사회의 규범과 인습 앞에서 어떤 이상적이며 도피적인 삶의 방식을 하나의 대안으로 내세우려고 했는데, 이는 이른바 일. 부일처제의 삶에 위배되는 것으로 수용되었습니다.

 

테는 『시와 진실』에서 이 작품에 관해서 약간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는 당시에 릴리 쇠네만 Lilie Schönemann을 깊이 사모했는데, 자신의 어정쩡한 태도로 인하여 그미에 대한 사랑이 실현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감정은 작품 「스텔라」에 반영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여자에 대한 한 남자의 연정은 괴테의 삶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더블린 출신의 영국작가 조나탄 스위프트 (Jonathan Swift, 1667 - 1745)는 “바네사”와 “스텔라”라는 두 여인을 동시에 사랑했는데, 특히 『스텔라에게 보내는 일기 Journal to Stella』가 독일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이때 괴테는 이 작품을 읽은 것으로 사료됩니다. 나아가 괴테는 레싱의 「사라 삼손 양 Miss Sara Sampson」(1755), 크리스티안 바이제 (Christian Weise, 1642 - 1708)의 감상적인 극작품「아말리아 Amalia」 (1655) 등에서 창작의 모티프를 얻은 것 같습니다.

 

 

 

 

이제 극작품의 줄거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1막에서 세실은 자신의 딸 루시와 함께 살아가는 여인입니다. 남편이 오래 전에 종적을 감추고 말았으므로, 딸을 키우면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남작 부인, 스텔라의 집을 찾아가려고 의도합니다. 루시가 남작부인의 집에서 일하기를 애타게 바랍니다. 두 사람은 남작 부인에 관한 소문을 듣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남작은 8년 전에 이곳 영지를 구매했다고 합니다. 당시 남작 부인은 천사처럼 아름다운 18세의 처녀였는데, 출산 직후에 아이를 잃었다고 합니다. 부부사이가 좋지 못하여 주인은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주인은 극이 진행되는 동안 주인공 페르난도로 밝혀집니다. 페르난도는 전쟁에 참여한 뒤에 자신의 영지를 찾게 되었는데, 잠시 우편국에 머물게 됩니다. 이때 그는 다음과 같이 중얼거립니다. “사랑하는 스텔라, 내가 왔소. 그대는 나의 접근을 감지하지 못하는가요?” 루시는 엄마가 방에 머무는 동안 식당에 내려가서 우연히 페르난도를 우연히 만납니다. 페르난도는 그미와 대화를 나눈 뒤, 루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실은 내가 영지의 주인이니 당신을 고용하겠소.”

 

제 2막에서 세실과 루시는 남작 부인을 찾아갑니다. 세실은 남작 부인에 대해 친밀함으로 느낍니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났는데도 마치 서로 오랜 친구처럼 느껴집니다. 스텔라는 따뜻한 심장을 지니고 감정적으로 풍부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미가 남편과 함께 보내던 나날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줄 때, 세실은 마치 자신이 스텔라의 남편과 행복을 누린 것과 같은 착각에 사로잡힙니다. 스텔라 역시 자신의 딸, 민아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경청하는 세실에게 호감을 느낍니다. 그미는 열광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면서, 새롭게 사귄 여자 친구에게 남편의 초상화를 보여줍니다. 세실은 남작의 초상화를 대하는 순간 엄청난 놀라움에 사로잡힙니다. 초상화에는 자신의 남편 얼굴이 그려져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세실은 일순간 현기증을 느낍니다. 이때 루시는 초상화를 바라보다가 낯설지 않은 얼굴이라고 말합니다. “아, 오늘 우편국에서 그분과 함께 식사했어요. 그분이 바로 그 사람이로군요.” 남작부인은 루시의 말을 듣고 어쩔 줄 모릅니다. 꿈에 그리던 남편이 되돌아 왔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차렸던 것입니다.

 

스텔라의 방을 떠날 때 세실은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초상화 속의 남자가 바로 내 남편이야. 그가 네 아빠란다.” 이때 루시는 몹시 당황해 합니다. 아무리 어릴 때 헤어졌더라도 아버지를 못 알아보다니? 세실은 딸을 말을 들으면서, 자신이 처한 정황을 깊이 숙고합니다. 얼마나 오래 기다리던 남편이란 말인가? 나와 헤어진 뒤 남작 부인과 결혼했단 말인가? 자신이 페르난도와 재결합하면, 남작부인인 스텔라는 다시 혼자 과부로 살아갈 게 뻔했습니다. 차라리 내가 그를 포기하는 게 나아. 나에게는 딸 루시가 있지만, 스텔라는 죽은 아이를 가슴에 묻지 않았는가? 깊은 숙고 끝에 세실은 페르난도를 포기하고, 딸과 함께 그곳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제 3막에서 페르난도는 자신이 제각기 사랑하던 두 여인과 재회합니다. 그 하나는 스텔라와의 만남입니다. “사랑하는 당신, 그렇게 오래 떠나 있다가 이제야 오셨군요.”, 하고 스텔라는 속삭입니다, “어느새 나이 들었지요? 가련한 삶이 내 뺨의 청춘을 앗아갔어요. 천사가 우리의 아이를 천국으로 데리고 갔답니다.” 스텔라는 일순간 두 모녀를 떠올리고, 페르난도로 하여금 그들을 만나보라고 종용합니다.

 

페르난도는 남작부인이 시키는 대로 두 모녀를 영지로 소환합니다. 그리하여 페르난도는 이전의 애인이었던 세실과 상봉합니다. 세실은 망설이다가,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전남편을 만나기로 결심합니다. 페르난도는 세실을 보는 순간 엄청난 놀라움에 휩싸입니다. 그미는 오래 전에 자신이 저버렸던 여인이 아니겠습니까? 페르난도는 무릎을 꿇고 사죄하면서, 스텔라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세실과 함께 살아가겠노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세실은 영지를 떠나겠다고 그에게 말합니다.

 

자고로 남성은 여성을 일방적으로 저버릴 수 있지만, 여성의 동의 없이 사랑을 실현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페르난도는 세실이 원하든 원치 않든 함께 떠나려고 결심합니다. 그는 세실과의 관계를 털어놓지 않고, 그냥 “세실이 떠나려고 한다.”고 스텔라에게 전합니다. 영문을 모르는 남작부인은 3인용 마차를 준비하게 합니다. 떠나기 전에 페르난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스텔라, 넌 내게 모든 것이었지. 그러나 우리는 이별해야 해, 안녕.” 이 말을 듣자 스텔라는 정신을 잃고 쓰러집니다. 세 사람은 떠나지 않고, 스텔라가 깨어날 때까지 그미 주위에 머뭅니다. 스텔라가 정신을 차렸을 때 세실은 모든 비밀을 털어놓습니다. “나도 이전에 페르난도의 부인이었어요.” 이 말을 듣던 스텔라는 자신이 본의 아니게 모녀에게서 한 남자를 빼앗았다고 자책합니다. 찢어지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던 스텔라는 병실을 떠납니다.

 

친애하는 J, 마지막 결말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일단 제 2원고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스텔라는 결국 독약을 먹고 자살하고, 페르난도는 그미의 죽음을 확인한 다음에 권총으로 자살합니다. 그러나 제 1원고에는 이러한 비극적 결말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페르난도는 두 여인을 끌어안고, “오, 나의 여인, 나의 여인이여.”하고 외칩니다. 바로 이 마지막 장면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작가 괴테를 신랄하게 비난을 가했습니다. 한 남자가 두 여인을 끌어안는 것은 유럽 시민사회의 일부일처제라는 관습에 위배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작품의 하자는 두 가지 사항에서 언급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극중 인물들이 자신의 특성과 역할에 있어서 생경한 특성 내지는 모순적인 면모를 드러낸다는 사항입니다. 이를테면 두 여인은 고전주의의 이상을 느끼게 하는, 이른바 “완전한 개인 (volle Individuen)”으로서의 고결한 품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들의 사랑은 어딘지 모르게 페르난도에 전적으로 종속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풍깁니다. 다시 말해서 세실과 스텔라는 자신의 사랑을 희생할 정도로 상대방에 대한 깊은 배려와 아량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스텔라의 자살은 극작품 내의 정황으로 미루어보건대 너무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극중 인물 페르난도 역시 어떤 하자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는 질풍과 노도의 풍운아입니다. 다시 말해 페르난도는 가정으로부터 구속되기를 싫어하는, 이른바 “사수자리 der Schuetze”에 태어난 자유인일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의 사회적 정치적 삶은 개인적 사랑의 삶과 처음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습니다. 사랑과 사회적 참여는 마치 따로 국밥처럼 서로 동떨어져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가 수행한 사회적 정치적 역할은 애정 문제 속에 완전히 용해되어 있지 않고, 지엽적 사항으로 머물 뿐입니다. 마치 두 개의 먹잇감 사이에서 어쩔 줄 모르는 부리단의 당나귀처럼 두 여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예술적이고 정치적인 측면에서 치밀함을 드러내는 표현 방식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런데도 괴테의 「스텔라」는 오늘날에도 자주 공연되곤 하는데, 그 까닭은 추측컨대 다소 유연하게 변화된 현대의 성윤리의 영향 때문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