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그리고 유희를panem et circenses”이라는 표현은 로마의 시인 유베날리스Juvenal에 의해서 유래된 것이다. 로마의 황제들은 과도한 세금을 거둔 다음에 인민에게 그 일부를 나누어주었다. 어리석은 인민들은 자신이 헌납한 재산의 일부를 돌려받는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채 감지덕지하는 마음으로 결투 게임 내지 서커스를 즐기곤 하였다.
순식간에 가난의 수렁에 빠진 한 사내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허름한 방으로 이주해야 한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뒤 그 다음날 거리로 나왔을 때 사내는 화들짝 놀란다. 자신의 소유물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원래 우리는 하찮은 물건들이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을 때, 그것들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뒤늦게 깨닫는다. 사내는 지금까지 편안하게 책장, 책상, 램프의 환한 광채 등에 만족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자신의 가재도구는 하루아침에 남의 소유가 되어 집 앞에서 초라한 이삿짐으로 내팽개쳐 있었다. 꾸역꾸역 품어내는 담배 연기만이 마치 자기 자신과 무미건조한 세상 사이의 간격을 좁혀주려는 듯이 흐릿한 상을 연출했을 뿐이다. 말하자면 자신의 자아는 이런 식의 담배 연기로써 모든 것을 몽롱한 상태로 변하게 해주었던 것이다.
집을 빼앗긴 데 대해 역겨움을 느끼는 사내는 호텔로 향한다. 호텔 종업원의 인사에 자신이 대접받는다고 느낀다. 최소한 어떤 자그마한 권한이라도 지녀야, 주위 사람들이 먼저 고개 숙이며, 자신에게 꾸벅 인사하리라고 여겨졌다. 만약 우리의 옷차림에서가난이 그대로 드러나면, 우리의 심신은 아마도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절망의 심연으로 나락하고 말 것이다. (물론 혹자는 가난이 때로는 내면의 찬란한 광채를 드러낸다고 말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체념한 자는 외부적 재산에 해당하는 부동산을 포기하기 전에, 이미 내면에 어떤 공간을 추상적으로 설정한다. 이러한 내면의 추상적 공간 속에는 가구, 심지어 양탄자 그리고 찬란한 안락의자가 그대로 있다고 착각한다.)
최상의 수면제는 아무래도 단잠일 것이다. 그런데 노예들을 꼼짝달싹 못하게 하는 최상의 방법이 있다. 그것은 노예들이 가난의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는 사회적 조처이다. 이는 비참한 말이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호텔 종업원들의 허리 굽힌 인사에서 드러나듯이, 가난 자체는 일반 사람들로 하여금 반역과 거역을 직접적으로 부추기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일반 사람들은 자신에게 충분한 재산이 없을 경우 강하게 저항하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상류층 사람들은 가난한 자들을 경멸하고 지속적으로 깔보는 것이다. 그런데 범죄자가 사회적으로 끊임없이 속출하는 사실은 부자들의 경멸감과 무관할까? 그렇지는 않다.
대부분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경우를 기이하게 여긴다. 즉 몇몇 부자들이 항상 무한대의 권력을 지니는 반면에, 노동자들은 마치 개처럼 비참하게 연명하는데, 차라리 한 번이라도 바리케이드를 치면서 노동쟁의라는 “위험한 게임va banque”을 벌이는 경우 말이다. 굶주림이 극에 달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주위의 가게를 습격하여, 식료품을 약탈하여, 순식간에 배를 채우면서 자신의 마음을 어느 정도 달랠지 모른다. 이러한 일이 실제로 벌어지면, 억압당하는 계층의 지도자는 마치 선장이 마이크를 통해서 기관실의 선원들에게 명령을 전하듯이 지금까지 침묵하던 사람들에게 어떤 지령을 전하게 될 것이다. 즉 혁명가가 되라고 추동하는 비밀스러운 지령 말이다.
물론 가난은 혁명의 충동을 위한 계기로 작용한다. 그러나 혁명의 충동력은 가난에서 직접 생겨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불평등한 소유 관계를 냉엄하게 감지함으로써 싹트고 강화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가난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가난 속에서 터져 나오는 은폐된 광채를 직접적으로 의식하는 일이다. 빵을 얻으려는 외침은 인간 삶에서 고결한 것이지만, 수많은 하극상의 폭력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또한 첫 번째, 그 다음의 가장 사실적인 방안을 위한 길을 마련해주었다.
그렇지만 빵을 얻으려는 외침은 유희를 위한 외침 없이는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으며, 혁명 그 이상의 의미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고대의 노예들은 체계적으로 훈련받고, 노예제도는 굳건하게 이어져 왔다. 그럼에도 간간이 폭동이 가능했다는 것은 결코 놀랍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타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신 뜻에 의해 사고하고 행동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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