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돌프라는 이름을 지닌 청년은 대학생이었는데, 잠시 고향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싫지만 그래도, 약혼녀와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청년은 더 이상 그미에 향한 연정을 품지 않게 되었다. 청년은 부모의 집에서 식사를 마친 다음에 식탁에 혼자 앉아 있었다. 자신의 처지를 돌이켜보기 위함이었다. 바로 이때 약혼녀는 밖에서 소리쳤다. 모두가 이미 떠났으니, 둘이서 오붓하게 만나자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청년에게는 그미와 함께 소풍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적어도 오늘만은 그냥 집에 머물고 싶었다. 처녀는 몹시 화가 난 듯이, 문을 쾅 닫고 사라졌다. 그렇지만 루돌프의 귀에는 문소리가 듣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어떤 생각에 골똘히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어린 시절 이래로 장식장에 관한 그림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장식장에는 로코코 양식의 공원이 보였다. 공원의 배후에는 산책로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아름다운 여인들과 신사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 뒤에는 높은 창문을 지닌 환락의 성이 나무의 우듬지에 의해서 절반 가려진 채 보였다. 창문은 아랫부분의 바닥까지 뻗어 있었는데, 황금의 창살로 장식되어 있었다. 광장의 십자 도로에는 여인 혼자 서 있었다. 그미의 손에는 하얀 종이판, 혹은 하얀 수건이 들려 있었다. 어릴 때 루돌프는 이것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다.
그미는 편지 한 장을 읽고 있을까, 아니면 손수건을 거머쥔 채 눈물을 흘리는 것일까? 루돌프는 순식간에 그림 속으로 가까이 다가선다. 장식장의 그림의 색채 그리고 윤곽 속으로 빠져드는 순간 신사와 숙녀들은 단 한 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루돌프를 지나치는 게 아닌가? 그는 신사와 숙녀들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길 위의 자그마한 자갈이 발바닥에 느껴졌다. 루돌프는 여인에게 향해 다가갔다. 그미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자신에게 다가오는 청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인은 편지를 읽고 있었다. 편지, 그래, 그는 오래 전에 그미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랑하는 당신, 이제야 나에게 오셨군요.” 여인은 황급히 외치면서, 편지를 아래로 떨구었다. “한 번도 중단한 적이 없이 당신을 오랫동안 기다렸어요. 나에게 오신다고 항산 편지를 보냈지요? 이제 모든 게 좋아졌어요. 당신이 오셨으니까요.” 두 사람은 뜨겁게 입을 맞추면서 숲속의 깊은 곳으로 사라졌다.
저녁 무렵이 되자 그들은 성으로 되돌아왔다. 그곳에는 축제를 위한 화려한 식사가 마련되어 있었다. 신사들과 숙녀들은 마침내 집으로 돌아온 성의 주인을 반갑게 환영하였다. 이윽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은 아름답게 치장된 방에서 휴식을 취했다. 아침 무렵 그들이 꿈을 꾸었을 때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수많은 나날이 그들을 스쳐 지나가고, 수많은 밤들이 바뀌는 달 모형 아래에서 지나쳤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유희와 축제를 즐기고, 사냥하며 의미심장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시간은 빨리 흘렀다. 오랫동안 외롭게 지내던 방은 마침내 다시금 젊은이들의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아름다운 여인은 “모든 게 당신의 것이에요.”하고 말했다. “다만 한 개의 문을 열어서는 안 돼요. 그래도 당신이 이를 지키면, 나는 아무 것도 잃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성의 주인이 된 청년은 깊은 밤, 자정 무렵에 창가의 통로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창밖의 정원을 바라보니, 어느새 가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나뭇잎들이 서서히 색깔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갑자기 누군가 자신에게 외치는 것 같았았다. 그것은 어떤 이름이었고, 어둠 속에서도 분명히 그 소리를 인지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 이름은 루돌프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었다. 외침은 분명히 어떤 방에서 퍼져 나오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 방안으로 한 번도 들어선 적이 없었다.
루돌프는 방문을 열었다. 방은 완전히 텅 비어 있었다. 벽에서 외침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벽에 걸린 그림 속에서 퍼져 나오는 소리였다. 성의 주인은 한걸음 더 다가가 그림 속에 그려진 방을 바라보았다. 방은 어둠 속의 외침 소리와 동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구들이 오래 전의 시대에서 자신에게 향해서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벽에 걸린 그림은 다시금 이전에 보았던 장롱 속의 그림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외침의 소리는 그림 속의 문으로부터 퍼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놀라면서 외침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림 속에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는 것은 바로 부모님의 방이었다. 바로 이 순간 그림 속의 외치는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약혼자는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었다. “루돌프, 언제 올 거야? 얼마나 오래 너를 기다려야 해? 차가 이미 떠났어. 너의 우울한 기분 때문에, 내가 하루를 그냥 헛되이 보내야 해?” 순간적으로 그의 몸이 꿈틀했다. 그는 약혼녀의 손을 잡고 그미와 함께 오래된 그림 앞에 다가갔다. “조용히 해, 그미가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니? 이건 손수건이야, 편지가 아니고.” 약혼녀는 루돌프의 상상을 이해하지 못했고, 누군가 우는 소리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몽상가가 언급하는 놀라운 파티는 그미에게는 그저 기상천외한 감정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지금까지 기이한 이야기를 요약해 보았다, 이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않지만, 우리에게 어떤 이중적인 문을 떠올리게 한다. 루돌프의 마지막 문장은 무척 감상적이다. 물론 이야기에 등장하는 손수건과 편지라는 대가성의 관계가 인위적으로 축조되어 있지만 말이다. 이야기에서 중요한 무엇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무엇이 잇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두 번이나 사라지는 어떤 액자 내지는 틀이다.
첫 번째 틀은 루돌프가 부모님의 방에 있는 장롱 속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성의 그림이며, 두 번째 틀은 아름다운 성 속에 그려져 있는 부모님의 방의 그림이다. 성은 아주 자그마하게 그려진 채 방의 그림 속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금지된 방 속에는 거실이 그려져 있고, 거실의 벽에는 부모님의 방에 관한 그림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중국의 초상화에 관한 모티프를 도외시하더라도 우리는 여기서 놀라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림 속으로 들어선다는 것은 거울 속의 거울이라는 복합적 형상 속으로 들어간다는 점을 뜻한다. 이는 일본의 예술에서 자주 드러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 앞에서 언급된 루돌프의 이여기는 중국의 모티프에 비해 훨씬 압도적이다. 적어도 앞부분에서 여인과의 만남은 강한 감정의 격동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그렇지만 나중에 상상에서 깨어날 때 이러한 감정의 격동은 순식간에 사라지지만 말이다. 루돌프는 어떤 그림을 통해서 어떤 다른 세계 속으로 발을 디디게 되는데, 나중에는 다시 그림을 통해서 그러한 세계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이중적으로 작동되는, 빙빙 돌아가는 문 (門)에 의해서 이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야기는 무슨 의미를 전해주가? 이야기는 시적인 의미에서 소유물을 찾으려는 노력을 암시해준다. 루돌프는 행복의 소유물이 과연 어디에 위치하는지 아직 한 번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행복의 소유물은 이중적으로 얽혀 있는 이야기를 통해서 몽환적으로 이끌려온 자신의 방문객을 사정없이 밖으로 내쫓는다.
이로써 루돌프는 다시금 일상과 조우하게 되고, 유감스럽게도 모든 게 하나의 상상의 공간에서 떠올린 갈망이라는 점을 감지하게 된다. 만약 사람들이 루돌프가 은빛 찬란한 눈길로 바라본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실제 현실에서 아직 존재하지 않는 이러한 상은 어쩌면 나중에는 유효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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