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12. 그래, 80년대 초에 비장한 각오로 한반도를 떠났습니다. 한 마리 볼품없는 “미운 오리새끼”는 아름다운 백조가 되어 유럽에서 찬란하게 날아올랐습니다. 처음에는 말이 통하지 않고 음식이 달라서 힘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곳 사람들은 돈이 없다는 이유로 가난한 사람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거나, “빽”이 없다는 이유로 올바른 주장을 깔아뭉개지는 않았습니다. 모든 것은 개별적 능력에 의해 합리적으로 평가되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속이는 일은 거의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유럽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보다 선량해서가 아니라, 대부분 제도가 민주적인 방식으로 정착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팔이 안으로 굽는 부당한 경우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미약하게 드러날 뿐이었습니다. 설령 한 끼를 굶는 한이 있더라도, 열심히 노력하면 소기의 성과를 달성할 것 같았습니다. 뮌헨의 루드비히 막시밀리안 대학교(LMU)의 세미나에 참석하여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1983년 6월 독일 뮌헨 대학교에서 처음으로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13. 독일의 장학금은 “등록금 면제”가 아닙니다. 원래 독일 대학에서는 무상으로 공부할 수 있으므로, 등록금이 없습니다. 장학금은 말 그대로 매달 나의 통장으로 입금되는 돈이었습니다. 그곳의 대학교수들은 나를 외국인으로 차별하지 않았고, 모자라는 능력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의지를 가상히 여겨 소견서를 써주었던 것입니다. 이후에 나는 뮌헨 대학교 그리고 프리드리히 나우만 재단으로부터 수년 동안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장학금(獎学金)은 그야말로 학문을 장려하기 위한 손씻이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연구비 문제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독일의 장학 재단은 연구 계획서를 철저하고도 엄격하게 심사하지만, 추후에 연구 결과물을 별도로 요구하지 않습니다. 연구 지원은 하나의 결과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에 비하면 “한국 연구 재단NRF”은 연구 결과물을 제출하지 않으면, 연구비를 환수한다면서 연구자들에게 온갖 잡다한 업무를 시키면서 으름장을 놓곤 합니다. 각설, 유학생으로 공부하는 동안에도 잡지에 대한 나의 관심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주립 도서관 내 동북아 지역의 부서에서 한국에서 간행되는 잡지를 뒤지곤 하였습니다.
14. 귀국했을 때 부산은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S대 출신의 독문과 은사들은 나를 불러 점심을 사주신 다음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자네는 소설 전공이지? 나와 K교수 모두 소설 전공이야. 그러니 다른 데에서 알아봐.” 섭섭함과 실망감이 내 마음에서 가실 줄 몰랐습니다. 한국에서는 교수 채용 시 학부부터 박사과정까지 동일한 학과 출신의 지원자를 우대합니다. 그러나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이와 다릅니다. 그들은 한 가지 전공만 편협하게 공부해서 복잡한 인간사를 어찌 이해할 수 있는가? 하고 반문합니다. 한국의 대학교에서는 다른 전공을 공부하는 것을 “밥그릇 침범”이라고 간주하고 금기시합니다. 박사학위 논문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나는 두 개의 부전공을 선택하였습니다. 사회주의, 페미니즘, 유토피아 그리고 루카치와 블로흐 등을 공부하려면, 어쩔 수 없이 다른 영역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의 주전공은 한국에서는 “독일 소설”이라는 분야로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15. 한국에서 사립대학교 교수는 직원과 다를 바 없습니다. 재단이 모든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으니, 교수들은 피해당하지 않으려고 출신학교별로 방어막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무런 “뒷배”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재단 소속의 신학 교수는 회식 자리에서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박선생, 줄을 잘 서시오. 그렇지 않으면 직장 생활하기 힘이 들 거요.” 순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떠올랐습니다. 그분은 가난하게 살면서 하해와 같은 사랑을 실천한 분입니다. 주위 사람들은 그의 마음에 감복하면서 자청해서 기독교도가 되었습니다. 만약 그 교수가 동료를 내쫓지 않고 그리스도의 애틋한 사랑을 베풀었더라면, 나는 누가 말리더라도 독실한 신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건 사립대학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의 크고 작은 단체와 법인은 구성원들에게 그런 식의 굴종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직원이 사장에게, 여성이 남성에게, 아이가 어른에게, 흑인이 백인에게, 거지가 부자에게, 무지한 자가 박사학위 소지자에게 자신의 최소한의 인간적 권리를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 사회적 토대를 만드는 것 –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민주화와 평등이라는 목표일 것입니다.
16. 학교에서 오래 읽은 잡지는 주로 『녹색 평론』이었습니다. 그러나 연대하면서 잡지에 나의 글을 발표할 수 없었습니다. 많은 단체들은 나를 이방인으로 배척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피에르 부르디외의 말대로 “문화 재생산” 그리고 “장(場)”의 가장자리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작은 톱니바퀴와 같았습니다. 큰 톱니바퀴에 피해당하지 않으려고 때로는 불의를 용인해야 했고, 때로는 타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폐쇄적 일자리는 본의 아니게 오류를 범하게 했고, 때로는 정도(正道)를 외면하게 했습니다. 남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강호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얄팍한 내공의 검객, 잠시 드러났다 사라지는 모래알이 바로 나라는 존재였습니다.
그렇지만 반복해서 말하건대 나를 키운 건 8할이 잡지입니다. 앞으로도 틈틈이 잡지 책을 읽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잡지의 내용에 대한 비판입니다. 비록 초라한 견해라고 할지라도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내 곁에 있다면, 아마 다음과 같이 일갈할 것입니다. 만나는 분들에게는 부드러운 자세로 고개를 숙이지만, 사실만큼은 냉엄하고 강퍅하게 의심하라고. 이러한 자세야말로 당신을 끝없이 발전시키리라고.
(끝,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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