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글

박설호: D 학점과 신춘 문예

필자 (匹子) 2024. 3. 26. 09:09

1. 방학 동안에 D 학점을 취득한 몇몇 학생들로부터 항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누구도 “경애하는 선생님을 뵙고 싶어 전화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 젊은이들은 그토록 학점에 민감하게 반응할까요? 장학금이라는 돈이 개입되기 때문일까요? 한편으로는 이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약간 서운했습니다. 하기야 유럽의 대학생들은 교수를 찾아 대학을 옮기는 데 비해, 한국의 학생들은 대학의 위치만을 고려합니다.

 

한국의 대학은 모조리 서열로 정해져 있습니다. 한국의 학생들은 대체로 학문을 추구보다는 학점과 졸업장 따는 일에 몰두합니다. 입학 문화만 존재하고 졸업 정원제는 실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등록금을 내면 졸업장을 자연스럽게 수령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아주 서운할 필요 없다고 나 자신을 다독거렸습니다. 그래도 섭섭한 감정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학문적 깊이보다는 (깊어 봐야 땅 짚고 헤엄치기 정도이겠지요), 인간적 장단점 때문에 젊은이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듬뿍 받고 싶은 것입니다.

 

2. 그러면 대학생이었던 나는 탁월한 학점을 취득했던가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학점 취득을 위한 시험공부에는 별반 관심이 없었습니다. 놀기 위해서 수업을 “째는” 게 아니라, 도서관에서 그냥 책을 읽고 싶었습니다. 나에게는 수강하는 일보다, 혼자 책을 읽는 일이 더 흥미진진했습니다. 흔히 대학에서 강의를 들으면 내용의 40%를, 혼자 책을 읽으면 20%를 기억한다고 하는데, 나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통계였습니다.

 

대학은 나에게 별반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다만 어학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한 게 아쉬울 뿐입니다. 당시에는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문예지를 읽곤 하였습니다. 독서를 통해서 혼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 나는 학자보다는 오히려 문인의 길을 걷고 싶었습니다. 이후로 20여 년간 끈덕지게 신춘문예에 응모하였으니까요. 그러나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매번 낙방의 고배를 마셔야 했습니다.

 

3. 말이 스무 번이지, 누구도 이로 인한 좌절감을 전적으로 공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동안 지어낸 필명 (筆名)만 하더라도 아마 한 다스는 족히 될 것 같습니다. 1. 박내성(朴乃城), 이것은 나중에 나의 아호가 되었습니다. 2. 지고원(池高元) 거꾸로 쓰면 원고지라는 뜻입니다. ㅋㅋ, 3. 박설준(朴雪俊) 이것은 불문과 여학우에 의해서 나와 나의 친구의 이름이 기괴하게 뒤섞인 것입니다. 4. 독고 달(独孤 達), 잘 기억나지 않지만, 혼자서 모든 것을 통달하고 싶은 집요한 내적인 욕구가 반영된 것 같습니다.

 

5. 서로박. 서양에서는 이름을 성 앞에 붙입니다. 필자는 지금도 이 이름을 사용하곤 합니다. 6. 나문립(羅文立) 나뭇잎과 관계되는 것 같은데 어디서 착안했는지 도통 기억나지 않습니다. 7. 피주봉. 기억하건대 데모하다가 백골 부대원에게 얻어터져서 바지에 핏자국을 묻힌 데에서 유래하는 이름인 것 같습니다. 8. 남궁 제(南宮 帝). 우물안 개구리처럼 좁은 세계에서 자만하는 옹졸함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4.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 이유에서 이러한 필명을 남발했을까요? 많은 필명과 가명을 사용하려는 노력은 어쩌면 자기 자신의 알리고 싶지 않으려는 결벽증에서 비롯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가령 독일의 작가, 쿠르트 투콜스키는 자신의 이름 외에도 네 개의 필명 (카스파르 하우저, 페터 판터, 테오발트 티거, 이그나츠 브로벨)을 번갈아서 사용했습니다. 이는 당국의 검열에 걸리지 않기 위한 하나의 방도였습니다.

 

그런데 이와는 전혀 다른 의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알리기 위해서 가명을 사용하는 것이지요.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논문 「사회 공간과 계급의 기능Espace social et fonction de classe」에서 수많은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명명 권력을 위한 투쟁의 가시적 흔적”이라고 말했습니다. (피에르 부르디외: 언어와 상징 권력, 김현경 역, 나남 2021, 305쪽.) 그렇다면 젊은 나의 신춘문예 응모 역시 명명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무의식적 발버둥이었을까요? 나의 심리 구조는 은폐와 노출 가운데 어느 것이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5. 맨 처음 신춘문예의 응모는 고등학교를 자퇴하던 해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다음에는 검정고시 준비생, 대학생, 방위병, 고등학교 교사, 유학생 등의 신분으로,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신춘문예에 끈덕지게 응모하였습니다. 수없이 낙방했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연속적으로 도전하였습니다. “노력 없이는 얻는 것도 없다.No pains, no gains.” 고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작가, 이문열처럼 마치 고시 공부하듯이 작품의 창작에 매달리지는 않았습니다.

 

응모 분야는 주로 시와 동시에 국한되었습니다. 왜냐면 학문에 뜻을 둔 나로서는 학업에 몰두해야 했고, 시 쓰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호세 오르데가 이 가세트는 아침에 일어나 바로 글을 써야 하는 데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책상으로 향하기가 싫어서 매번 화장실을 들락거렸다고 합니다. 이처럼 소설을 쓰는 일은 끈기 있는 전력투구를 강요합니다. 읽어야 할 책이 산적해 있는 나로서는 소설 쓰기를 처음부터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6. 처음 낙방할 무렵에는 무능한 자신이 못내 미웠습니다. 그러다 낙방에 주눅들 무렵에는 (얼씨구?) 무고한 심사위원들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심사하는 동안 수천 편을 읽으려면, 편당 몇 분이 소요될까? 심사위원의 심사 기간은 대충 4일 정도 됩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넉넉잡아 5,000분, 읽어야 할 작품이 2,000편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그렇다면 쉬지 않고 읽는 데에만 편당 2분이 소요됩니다. 그러니 심사위원들은 마치 우체국 직원처럼 우편물을 분류하는 데 골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혹시 시적 주제보다도 미사여구 내지는 꾸밈말로 모든 걸 평가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열 번 이상 떨어졌을 때 다음과 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어쩌면 모든 과정이 짜고 치는 고스톱판일지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대형마트의 경품 행사에서 당첨되는 사람들은 주로 마트의 사장과 직원의 가족들이 태반이 아닌가요? 용렬스러웠던 나는 그만큼 고개 숙인 나락으로 성숙하게 자라지 못했습니다.

 

7. 물론 결선에 올라가 두 번 낙방한 적이 있었습니다. 가령 나는 다음과 같은 경우를 체험했습니다. 1977년 신문사에 원고를 보낸 뒤 나는 신춘문예를 까마득히 잊은 채 군대에 끌려가야 했습니다. 당시 눈이 나쁜 관계로 방위병 근무를 해야 했는데, 공교롭게도 무려 12주 동안 훈련해야 했습니다. 1월초 군에 입대하여 논산에서 훈련받던 박태일 시인이 내가 근무하는 중대 본부로 엽서 한 장을 보냈습니다. “친애하는 박 형, 훈련소 간이 변소에서 밑씻개 삼아 신문 조각을 찢어 들었소. 형의 이름이 낙선자 명단에 적혀 있더군요.”.

 

1977년 1월 1일자 한국일보에는 김남조 시인의 다음과 같은 심사평이 실려 있었습니다. 정확한 문구는 아니지만 대충 다음과 같았습니다. “박몽구와 박설호의 시는 이러이러한 이유에서 채택되지 않았다.” 박태일 시인은 불과 1년 전에 신춘문예에 당선하여 혜성 같은 신인으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가 낙방한 문우를 격려하려는 선한 의도에서 엽서를 보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때문에 내가 근무하는 부대의 중대장에게 곤욕을 치른 것을 기억하면, 지금도 아찔한 느낌이 듭니다.

 

8. 대학에서 근무하게 된 다음부터 신춘문예에 응모하는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나의 동료들이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곤 하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젊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시 쓰기를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지금 나의 서랍 속에는 미발표 시편들이 마치 시집가지 않은 딸년들처럼 나를 째려보며 원망의 눈물을 흘리는 것 같지만, 뒤늦게 오래된 시편들을 발표한다는 것 자체가 신명 나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자고로 수십 년 낡은 사진을 바라보는 자의 얼굴에는 과거의 모습에 미소가 만연해 있는 법인데, 오래된 시편은 당사자에게 어떤 겸연쩍음을 불러일으키게 합니다. 게다가 우리 앞에 서성거리는 미발표 작품은 끊임없이 수정해달라고 요구하지 않는가요? 작품은자신의 설익은 감성을 여지없이 반영하고 있으므로, 그렇지만 “나의 시는 나의 사리(舎利)”라고 자신을 다독거렸습니다. 이로써 끊어질 듯 말 듯 나의 시 쓰기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9. 각설, 물론 결과론이지만, 스무 번의 낙방이 내게 하나의 보약으로 작용한 셈입니다. 설익은 에스키스를 성급하게 공개하지 않은 것도 다행입니다. 인간 동물은 성공보다는 실패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는 법입니다. 나의 저서 가운데 『실패가 우리를 가르친다.』라는 게 있습니다. 그래, 실패할지언정 포기하지 않으리라. 어쩌면 나는 한 마리 매미의 영혼이었는지 모릅니다. 오랜 세월 애벌레로 어둠 속에서 방황하다가 언젠가는 마치 번데기에서 나와 찬란히 하늘을 나는 매미, 그가 바로 나 자신이었습니다.

 

신춘문예는 내 집필의 시험대였습니다. 신문사는 새해마다 나에게 수없이 채찍질을 가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모든 것은 나의 수련을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실력을 쌓기 위한 스파링이라고나 할까요? 아니 신춘문예는 나에게는 설익은 에스키스를 만들게 한 창작의 가마,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어리석은 도공은 제 능력이 부족한 것을 모르고 언제나 가마를 탓하곤 했지만, 이 과정에서 도공의 실력은 아마도 조금씩 향상되었을 것입니다

 

10. 돌이켜보면 낙방에 대한 회한은 없습니다. 게다가 나는 젊은 사람들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일하지 않았던가요? 제자를 키우고 그들을 등단시키는 게 나의 임무가 아니던가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필자는 훌륭한 선생은 못 되나, 결코 엉터리는 아니라고 자부하며 살아왔습니다. 지금까지 수업을 빼먹고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는 학생이 내 앞에 나타나 강의가 신통치 않다고 항의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시험의 점수는 배움의 과정에서 얻게 되는 수행 평가일 뿐, 자신의 근본적인 능력에 대한 평가는 아닙니다. 시험을 마치 하나의 결과로 생각하고 여기에 목을 매는 태도, 합격이 능사로 생각하고 모든 것을 시험으로 평가하려는 시회적 통념은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고로 추락하는 자에게는 어설픈 날개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 성급하게 날아올라 추락하는 만용을 부릴 필요는 없습니다. 게다가 운전면허 시험에 자주 떨어진 사람이 나중에 교통사고를 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D 학점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