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자서전에는 거짓이 포함되어 있다. 부끄러움과 자랑스러움이 당사자를 검열하기 때문이다." (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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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1960년대에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판자촌에는 찢어질 정도로 가난한 아이들이 살았습니다, 중학교 교실은 콩나물시루와 같이 버글버글했는데, 그만큼 경쟁도 치열했습니다. 부모들은 어떻게 해서든 자식을 일류 학교에 보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일이야말로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첩경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신분에 대한 구분은 거의 사라졌지만, 빈부 차이는 매우 심했습니다. 사람들은 “나의 자식” 교육에만 신경을 곤두세웠을 뿐 “우리의 자식” 교육에는 아예 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부모들은 제 자식의 성공만을 바랄 뿐, 바람직한 교육제도에 대해서는 별반 관심이 없었습니다. 학벌은 여전히 신분 상승의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이로써 “상류층”은 피에르 부르디외의 말대로 교육을 통해서 다음 세대에 재생산되어나갔습니다.
2. 부산 영도에서 자랐습니다. 당시에는 모두가 궁핍했습니다. 우리 집도 동화책을 마음대로 구해서 읽을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습니다. 다행히 아버지는 나에게 문학적 자양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아버지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는데, 공부를 포기하고 낙향하여, 양계 사업에 착수했습니다. 틈나는 대로 시를 쓰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버지는 형님과 동생들을 앉혀 놓고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배를 타고 항해하는데, 갑자기 큰 소리가 퍼졌다. ‘이 배는 오 분 후에 가라앉는다.’ 갑자기 커다란 새 한 마리가 주인공을 납치하여 천길만길 낭떠러지 아래로 날아갔다. 거기에는 거대한 식탁이 있었는데, 너무나 맛깔스러운 음료수 그리고 많은 종류의 치즈로 가득했다.” 이버지의 이야기는 쥘 베른, 천일야화 그리고 그림 동화의 내용이 마구 뒤섞인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가 즉흥적으로 지어낸 잡탕 이야기를 들으면서 꿈을 키웠고,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었습니다.
3. 돌이켜 보면 지금까지 나에게 정신적 자양 역할을 한 것은 주로 잡지였습니다. 서정주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잡지였습니다. 학교생활은 지루함의 연속이었습니다. 물론 인품이 훌륭한 선생님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나의 스승은 주로 잡지 책이었습니다. 어릴 때 외삼촌은 “사상계”의 구독자였습니다. 아마 60년대였을 것입니다. 초등학교 학생이 장준하 선생이 간행한 사상계를 어찌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나는 조숙했지만, 영재(英才)가 아니었습니다. 가끔 나는 청학동 산 중턱에 있는 외삼촌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너무 어려워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고등학생이 된 뒤에 이 잡지를 읽었을 때 느꼈던 흥분이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상계는 아시다시피 김지하의 오적 사건으로 발행 중단되었습니다.
4. 중학교 3학년 무렵 월간지 『현대문학』을 처음으로 접했습니다. 형의 친구가 현대문학을 구독하는 것을 보고 나도 따라 읽었습니다. 그 형은 특히 최상규의 소설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이때부터 현대문학을 매달 구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꼬깃꼬깃 쌈짓돈을 모아서 부산의 보수동 헌책방 골목을 샅샅이 뒤지곤 했습니다. 잡지의 수집은 어쩌면 병적 집착과 같았습니다. 한 호라도 건너뛰어서는 곤란했습니다. 기억하건대 특히 김원일, 홍성원, 이병주 그리고 박경리 등의 소설을 탐독한 것 같습니다. 비평의 글들은 어려웠지만, 정성을 기울여서 독파하지 않은 게 지금 생각하면 다행이라 여겨집니다. 주간인 조연현은 노골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은근히 일본을 애호하는 문학가로서, 백철 김동리 등의 순수 문학을 두둔하고 있었습니다. 표문태의 소설들이 『현대문학』에 실리지 않는 이유를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사상적으로 좌파의 글을 의도적으로 싣지 않는 데 대해 실망했습니다.
5. 고교 시절에 내 마음을 격랑의 파도 속으로 몰아넣거나,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던 것은 여전히 문예지였습니다. 그래, 고등학교 시절 『창작과 비평』 그리고 『문학과 지성』을 접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독서 성향은 어느새 월간지에서 계간지로 서서히 바뀌었던 것입니다. 가난한 형편에 매달 용돈을 털어서 월간지를 구매한다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었습니다. 계간지에 정선된 글이 수록된다는 것을 나중에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나는 여전히 영도의 섬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영도는 주위의 소문이 전하는 바대로 “모두 가산을 탕진하고 빈손으로 떠나는 섬”이었습니다. 섬을 떠나던 고등학교 이학년 무렵에 『현대문학』을 읽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할 때 임헌영 선생이 간행한 『대화』라는 잡지가 가장 훌륭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6. 아버지의 사업은 송도에서 붕장어를 일본으로 수출하는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선원의 밀수 사건에 연루되어 아버지는 어음의 대금을 갚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돈을 빌려준 사람은 아버지를 고소했는데. 민사 재판에서 아버지인 피고가 이기고 말았습니다. 법을 전공한 분이라 놀랍게도 변호사 없이 재판에서 승리했던 것입니다. 빚쟁이는 아버지를 이번에는 형사로 엮어 고소했습니다. 돈을 갚지 못했으니, 사기죄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아버지는 10개월 구금형을 받았습니다,
당시에 우리 가족은 영도를 떠나, 대연동의 소음과 톱밥이 가득한 통나무집으로 이사해야 했습니다. 목재소를 경영하는 이모부가 갈 곳 없는 우리 가족에게 거처를 마련해준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부산 N고등학교에 수석으로 합격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장학금 한 푼도 받지 못했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정기적으로 월말고사를 치른 학생들을 운동장에 집결시켜 놓고, 세 명의 성적 우수자에게 만 원이 들어있는 흰 봉투를 건네주는 게 전부였습니다. 당시 자장면 한 그릇은 300원 정도였으니까, 만원은 오늘날의 가치로 아마도 약 20만 원 정도일 것입니다. “고등학교 수석 입학생은 제때 수업료를 내지 못해서 학교를 자퇴해야 했다.” 이것은 오늘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이었습니다. 이년 후에 나는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취득했습니다.
(2, 3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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