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글

서로박: (2) 부르디외, 나를 키운 건 8할이 잡지다

필자 (匹子) 2023. 9. 10. 10:40

(앞에서 계속됩니다.)

 

7. 이 무렵 나에게는 잡지를 읽을 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왜냐면 대학 입학시험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지식인들은 당락을 위한 상대 평가 그리고 경쟁 교육을 맹렬하게 비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SKY 대학생들을 수재들로 인정하면서, 시험을 통한 선발 그리고 능력주의 자체를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개개인의 능력 차이는 처음부터 시험을 통해서 가려질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자고로 시험은 처음부터 묻는 데 대한 대답만을 요구한다는 한계를 지닙니다. 명저 한 권 읽지 않고 시험만 잘 치르면 당락이 결정되고 수석과 꼴찌가 정해집니다. 이러한 사회는 기껏해야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듣는 수동적 관료만을 키워낼 뿐입니다. 창의력과 비판력은 무엇보다도 독서와 토론을 통해서 발전될 수 있습니다.

 

나아가 법학과 의학만을 선호하는 풍토 역시 문제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서울대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교양과목은 수학이라고 합니다. 새내기들은 의대에 진학하기 위해서 첫 학기에 수학을 선택하며 “반수”합니다. 의대 진학의 이유는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가장 따분한 학문을 “법학”이라고 일갈했습니다. 법학도들은 허구한 날 법전을 달달 외우는 데 시간을 보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돈과 권력을 추구하고 시험만을 중시하는 풍토에서는 절대로 노벨상 수상자가 배출되지 않습니다. 일본은 노벨상 수상자를 16명 배출했고 그 가운데 기초 과학 분야에서 13명이나 되지만, 한국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평화상 외에는 아직 한 명도 없습니다. 새로운 사실을 깨닫고 느끼며, 정서를 안정시키고, 세상의 난제를 직시하려는 학생은 안타깝게도 오늘날 소수에 불과합니다.

 

8. 잡지 책을 읽는 버릇은 이는 대학생 시절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내가 다니던 지방 대학 교수들 가운데에는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석사학위를 취득한 다음 교수로 승격(?)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의 인품은 훌륭했으나, 외국인이 오면 도망치기 바쁜 분들도 있었고, 손으로 호두를 굴리는 교수도 있었습니다. 어느 교수는 누렇게 찌든 강의록을 수십 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독문학사 과목을 수강했습니다. 담당 교수는 강의 시간 내내 교재를 그냥 줄줄 읽었습니다. 독문학사 수강이 의미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 시간만 되면 도서관에 가서 독문학사의 원서를 구해서 읽었습니다. 교수는 결석하는 나를 호출하더니, 나에게 일갈했습니다. “자네가 학생인가?” 내가 수업을 “째고” 놀러 다닌다고 지레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차마 나의 입에서 “선생님 강의가 지루하여 도서관에서 독문학사 책을 읽었습니다.”라는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습니다. 기막힌 에피소드가 아닐 수 없습니다.

 

9. 당시 학생들은 두 부류로 분할되어 있었습니다. 한 부류는 도서관에 틀어박혀 고시 공부에 매진했고, 다른 한 부류는 백골단과 싸우다가 얻어터진 다음에 노여움의 술만 들이켰습니다. 나는 양측에 속하지 않는 문학도였습니다. 가끔 대학 신문에 글을 써서 원고료를 타곤 했습니다. 남들에게 독식(独食)한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가명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신춘문예에 응모하는 과정에서 지어낸 필명이었습니다. 박설준(朴雪俊), 독고달, 피주봉, 남궁제, 지고원(池高元). 당시의 고료는 2,500원 정도 되었습니다. 그 돈으로 막걸리 한잔 걸치고, 남는 돈으로 책 한두 권 정도 살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당시에 읽었던 글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맬컴 엑스에 관한 김종철 선생의 논문, 루카치와 브레히트에 관한 반성완 선생의 논문이었습니다. 언젠가 용기를 내어 대학 신문에 바슐라르의 시학에 관한 글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다음 날 국문과 교수님 한 분이 나를 호출했습니다. “니가 바슐라르를 알아?” 불어도 모르는 독문과 학생이 아는 체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나는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부족한 게 있으면 더 가르쳐주고, 틀린 게 있으면 구체적으로 수정해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요.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혼자서 영어와 불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10. 프란츠 파농처럼 혈기에 넘쳤던 국외자 – 그가 바로 나였습니다. 시간 나는 대로 철학과에 가서 윤노빈 교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윤노빈 교수님은 나의 은사 가운데 한 분입니다. 그분을 통해서 리영희 선생의 책을 접할 수 있게 된 것은 그야말로 행운이었습니다. 직접 배우지는 않았지만, 책을 통해서 나를 가르친 분이 리영희 선생이었습니다. 지금도 두 분에게 고마움을 느낍니다. 두 분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반공과 독재 국가의 횡포를 추상적으로 받아들였을 테니까요. 베트남 전쟁에 관한 지식도 섭렵했습니다. 중국과 북한이 공산주의와는 거의 상관이 없는 관료주의 국가라는 사실 또한 깨달았습니다. 언젠가는 나도 책을 저술함으로써 멀리 있는 제자를 키우리라 결심했습니다. 부마 사태를 전후하여 군에 입대해야 했습니다. 박태일 시인은 군대로 엽서를 보내 한국일보 신춘문예 낙선자 명단에 내 이름이 거론되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11. 70년대 말에 군복무를 마쳤습니다. 전포동에 있는 부산 D고에서 교편을 잡을 때도 잡지 읽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나를 전율에 사로잡히게 한 잡지는 함석헌 옹이 간행하는 『씨ᄋᆞᆯ의 소리』였습니다. 예컨대 전태일이 분신자살 사건이 보도된 책이 바로 그 잡지였습니다. 518 광주 사태가 발발했을 때, 수많은 사복 경찰관들이 내가 근무하는 교무실을 점거했습니다. 부산 D고는 데모 많이 하는 학교로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내가 수업 시간에 주먹을 쥐면서 학생들에게 “씨ᄋᆞᆯ의 소리”를 읽어주었다고 했습니다. 학위를 마치고 귀국했을 때 제자들은 당시에 주먹을 쥐던 내 모습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유학 가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나는 완강하게 반항하는 전교조 교사로 수년 동안 고초를 겪었을 것입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