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내 단상

(단상. 556) "신유물론" "사변적 실재론"

필자 (匹子) 2023. 2. 7. 07:12

새로운 물질 이론에 관한 관심이 높다. 신유물론에 관한 논의는 과거에 포스트모더니즘이 그러했듯이  유행을 타고 번지는 것 같다.

 

신유물론은 인류세에 즈음한 생태계 위기의 관점을 반영한 사고의 관점에 근거한 것인데, 1. 물질의 행위성을 강조하는 페미니즘의 관점, 2. 인간과 자연의 동등한 관계를 추구하는 사변적 실재론 등으로 구분된다.

 

1. 물질의 행위성을 강조하는 페미니즘의 관점: 우리는 몸, 타자, 환경, 지구 등이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고 사고한다. "물질Mater"은 세계의 발효하는 모태,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자궁으로서 "어머니Mutter"에서 비롯한 단어이다. 이 점에 있어서 신유물론은 남녀 평등, 자연과의 공생, 평화의 추구 그리고 절약을 추구하는 공동체의 관습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삶이야 말로 21세기에 인류가 걸어야 할 방향인지 모른다.

 

2. 인간과 자연의 동등한 관계를 추구하는 사변적 실재론: 세계는 인간과 동등한 존재로 인정된다. 여기서 인간은 주체이고, 세계는 객체라는 종래의 주장은 수정되어야 한다. 인간의 몸은 "세계의 몸"에 해당하는 아담 카드몬과 마찬가지로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논의는 따지고 보면 셸링Schelling 그리고 에른스트 블로흐Bloch의 사고에서 이미 나타난 바 있다. 가령 셸링의 세계 속에 영혼이 자리한다고 상정하였다. 블로흐는 자연 주체에 관해서 암시한 바 있다. 자연 주체에 대한 관심사는 블로흐의 저작물, "세계의 실험 Experimentum mundi" 제 218쪽에 자세히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필자는 첫 번째 관점에 대해서 전적으로 공감하지만, 두 번째 관점을 학문으로 확정되기 힘든 관점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세계 속에 영혼이 자리한다고 상정할 수는 있지만, 세계의 관점에서 자신과 인간을 역으로 완벽하게 고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죽음을 모르듯이, 자연을 완전무결하게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책은 마치 하나의 암호처럼 그야말로 "사변적으로" 투시될 뿐이다. 쇼펜하우어도 말한 바 있듯이, 인간의 눈은 마치 마야Maja의 면사포에 의해 가려져 있어서 길가에 버려진 노끈을 하나의 뱀으로 착각하기 일쑤이다. 사변적 실재론이 안타깝게도 회의주의에 침잠할 위험에 처하게 되리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한계성 때문이다. 자연은 몇몇 인간에게 자신의 본질을 조금씩 "계시ἀποκάλυψις", 다시 말해 열어젖힐 뿐이다.

 

사변적 실재론은 철학의 영역에서가 아니라, 미학, 어쩌면 시학의 영역에서 만개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로지 상상력을 통해서 자연의 관점에서 인간 그리고 자신을 역으로 투시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유물론의 참신한 시각이 페미니즘 소설의 영역에서 구체화될 수 있다면, 사변적 실재론은 어쩌면 시의 영역에서 찬란하게 만개할지 모른다. 

 

참고 자료: 1.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의 가이아,

2.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의 집합체, 객체 지향 존재론

3. 디패시 차크라바르티Dipesh Chakraberty의 행성,

4. 카렌 바라드Karen Barad의 얽힘, 양자 현상

5.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여성주의, 공산 (Sym+poiesis), 함께 생산해내는 일

6. 제인 베넷Jane Bennett의 행위성, 생명의 유물론

7. 혜강 최한기일기운화 (一氣運化),

8. 동학과 천도교의 하늘/한울,

9. 다석 유영모얼돌이, 한얼의 정신 (우주 생명) (이기상 교수의 글 "사이에서 뜻을 태우며 사는 인간")

10. 장일순과 김지하의 한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