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철학 이론

블로흐: 탈레스, 헤라클레이토스의 물질 이론

필자 (匹子) 2022. 11. 5. 09:58

우리가 의존할 수 있는 것은 으레 이중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 여기에는 강물이 흐르고, 저기에는 조용한 강변이 가만히 있다. 강물과 강변은 모두 가시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두 영역 모두에 동조하는 느낌, 혹은 부정하려는 느낌이 자리하고 있다. 강물을 찬양하는 자는 강가에서의 죽음을 두려워한다. 강변을 찬양하는 자는 강물 속의 허망함으로 인하여 겁에 질린다. 우리의 사고가 신선할수록, 이러한 유형의 가치를 따지는 태도는 더욱더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럴수록 두 가지 사항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작업은 더욱더 열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 경우 한 가지가 다른 한 가지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사람들은 운동이 가치 있는가, 아니면 휴지가 중요한가를 따지게 된다. 인간의 오관은 두 가지로 향하고 있다. 그렇기에 고대의 사고는 양쪽의 극 사이에 하나의 뚜렷한 부호를 설정하고 있다.

 

탈레스는 어디서나 현존하고, 기초적으로 “주어져 있는” 근원적 소재를 바로 흐르는 무엇으로 규정하였다. 아낙시메네스는 근원적 소재를 숨을 내쉬고 들이마실 때 감지하는 공기라고 규정했으며, 아낙시만드로스는 그것을 끝없이 발효하는 무엇이라고 단정하였다. 아낙시만드로스의 경우 영속적인 무엇, 말하자면 고착된 무엇은 모조리 흐르는 무엇으로 이해되었다. 말하자면 아무도 암석을 기본적 소재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이것은 마치 (인간을 돌로 변하게 하는) 메두사처럼 모든 것을 경직하게 만든다. 여기서 아낙시만드로스의 다음과 같은 문장이 출현한다. 사물들은 “필연적으로” 사멸한다. 이것들은 “시간적 질서에 따라 자신이 저지른 불법에 대해 제각기” 참회한다고 한다. 변모, 어쩌면 개별적인 것 그리고 다양한 것은 마치 죄인처럼 출현하고, 변화의 과정에서 어떤 그림자를 드리우는데, 이것이 바로 휴지(休止)라고 한다.

 

만약 누군가 변동하는 무엇, 혹은 불변하는 무엇을 고찰하면서 이에 대해 인간적으로 강력한 친화력을 느끼게 되면, 오관에 입각한 비판적 사고가 서서히 자라나기 시작한다. 인간의 감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분명히 알려준다는 것이다. 이로써 비가시적인 무엇은 “진리에 합당한 έν έτεἦ” 게 아니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적인” 친화력은 -이를 마련해주는 명백성과 함께- 의심할 여지 없이 사회적으로 조건화된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지적해야 할 게 있다. 사물의 근원은 인간이 탐색해서 찾아낼 수 잇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고매한 헤라클레이토스Heraklit는 무엇보다도 변동성을 내세웠으며, 풍자의 작가 크세노파네스Xenophanes는 무엇보다도 경직성을 부르짖었는데. 이로써 두 사람은 제각기 방랑하는 광시곡을 연주한 셈이었다. 바로 이때부터 다음과 같은 견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즉 세계는 인간이 감각적으로 인지하는 무엇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오관은 인간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는 사람들에게 진리의 역설로 다가오게 된다. 인식은 역설적으로 “생각 내지는 상과 반대되는 것δόξα”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인식 행위가 “사멸하는 인간 존재의 견해”와는 반대되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이때 헤라클레이토스는 (자신의 방식대로 불 그리고 물의 생성과 변화를 강조하는) 흐름의 교사라고 말할 수 있는데, 놀랍게도 엘레아 학파와는 달리 감각적 현상에 대해 완강하게 부정적으로 평가하지는 않았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하는 이른바 어두움은 엘레아 학파 사람들의 정태적 광기에 도달하지는 않았다. “인간이 바라보고, 들으며 경험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나는 우선권을 부여하려고 한다.” 이에 반해서 파르메니데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사고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존재는 같은 것이다. (...) 따라서 언젠가는 죽는 인간이 존재를 변화와 사멸이라고 명명하면, 그들이 장소의 변화 그리고 어슴푸레한 색채의 변화 과정에 관해서 말하면, 그것은 오로지 명칭에 불과한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견해”와 동등한 정도로 인간의 오관을 가볍게 보지 않았다. 오히려 감각적 움직임 내지는 운동 속에서 어떤 심층적인 깊이를 발견하였다. 인간의 감각은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 비해서, 인간의 “견해”는 어떤 경직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변모에 관해서 가르칠 때 존재를 부인하지 않았다. 세계의 근본적인 원소로서의 불은 존재의 가장 강력한 열정을 담고 있는 무엇으로서 해명되고 있다.

 

이로써 헤라클레이토스는 고대인들이 인식하고 있는 세계에 관해서 정곡을 찌를 수 있었다. 말하자면 존재, 즉 있음과 반대되는 것은 변모가 아니라, 무(無), 다시 말해서 없음이라는 것이었다. 이 점을 고려하면 엘레아 학파와 반대되는 견해를 지닌 철학자는 헤라클레이토스가 아니라, -광기의 측면에서 고찰할 때 제논의 동시대인이었던 소피스트 고르기아스였다. 고르기아스는 세 가지 측면에서 존재를 부인한 터무니없는 소피스트였다. 존재라는 것은 고르기아스에 의하면 그 자체 존재하지 않고, 인식되지도 않으며, 타인에게 전해질 수도 없다고 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변모는 한마디로 “변화 – 존재”이다. 게다가 그는 이것을 절대적인 무엇으로 규정하지도 않았다. 휴지 (休止)는 (팽팽한 만곡 속에서의) 대립하는 것들의 일시적인 균형으로 규정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정지 상태는 최소한 흐름 속에서 단 한 번 정점에 이르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제자 크라틸로스는 선생의 주장을 더욱 날카롭게 변화시켜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은 동일한 변모의 과정에서 정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세계는 헤라클레이토스에 의하면 매 순간 불안정하며, 멈춤이 지나치는 장소라고 한다. 이러한 통로는 꾸불꾸불하거나 직선으로 이루어져 있고, 좋거나 나쁘며, 부족하거나 충분한 양을 지니고 때로는 위로 향하고 때로는 아래로 향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디오니소스와 하데스는 같은 존재라고 한다. “대립은 하나로 귀결되고, 이질적인 것으로부터 가장 아름다운 조화가 탄생하며, 모든 것은 싸움의 과정에서 생겨난다.” 그렇기에 헤겔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을 떠올리면서 “땅이야!”하고 외쳤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자면 그곳은 땅이 아니라, 바다, 다시 말해서 고대의 군인들이 외친 바 있는 “탈라타”, 즉 불의 바다를 지칭한다. 그런데 운동을 이해하고 이를 즉시 변증법적으로 포착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발언보다도 더 신뢰할만한 것은 아마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