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철학 이론

블로흐: 엠페도클레스, 데모크리토스, 아낙사고라스의 물질

필자 (匹子) 2022. 11. 8. 09:21

불(火) 혹은 돌과 같은 견고함이라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성질은 사실로 확정될 수 없다. 운동은 멈추어 있는 무엇을 연속적으로 공격한다. 그렇게 되면 휴지(休止)의 소재는 여러 가지 다른 작은 것들로 파괴되고 만다. 엠페도클레스의 경우 존재 자체는 변하지 아니한다. 그렇지만 그가 고찰하는 네 가지 원소 사이에는 사랑과 미움이 주도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말하자면 원소 속에 자리하는 사랑과 미움이 서로 결합하고 해체되곤 한다는 것이다. 사랑과 미움은 개별적 사물들의 변화 내지는 다양성을 깨닫게 해준다고 한다. 말하자면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친 다음과 같은 사고가 엠페도클레스에 의해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즉 사물의 다양성은 무엇보다도 증오에서 유래하는데, 이는 마치 쓰레기와 같은 유형이라고 한다.

 

세계의 원상태 속에서는 증오는 엠페도클레스에 의하면 멀찌감치 물러나 있으며, 사랑이 주도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에 반해 세계가 분리되면, 그 부분에 해당하는 “우주 κόσμος” 속에는 투쟁이 주도적으로 자리하면서 상대를 주도적으로 밀친다고 한다. 그렇지만 오로지 단순한 사물들은 분화의 과정에서 서로 합쳐지고, 조직적으로 변화된다. 이는 오로지 갈등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말하자면 단순한 사물들은 “동경을 자극하여 종국에는 결혼이라는 작품을 완성하는 아프로디테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주에는 어떤 거대한 잔여물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 속에는 아직 분화되지 않은 네 가지의 원소가 조용히 머물고 있는데, 아낙시만드로스는 이러한 상태를 비결정적이라고 말했고, 엘레아 학파는 일원적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모든 분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이러한 정지 상태로 귀결된다고 한다. 분화는 세상을 나누어진 무엇으로 만들어낸다. 다시 말해 분화는 다양한 사물들이 자리하는 어디서든 간에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어쩌면 가장 반동적인 세력으로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낸 바 있다. 이러한 특징은 셸링의 철학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렇지만 데모크리토스의 경우 냉정함이 궁극적으로 승리를 구가하고 있다. 사랑과 미움의 특징은 이제는 타오르지 않게 되고, 불, 물, 공기 그리고 흙이라는 네 가지 원소는 모조리 꺼져버린다. 데모크리토스는 운동을 기계적으로 파악한다. 모든 움직임은 어떤 밀침에 의해서 작동된다. 이로써 존재의 작은 부분은 생겨나지 않으며, 운동은 이것들 속에 내재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휴지의 존재 자체는 정지 상태로 인하여 오로지 관성을 지니고 있을 뿐, 그 자체 불변함이라든가 일원성이 아니다. 데모크리토스는 엘레아 학파 철학자들이 고수하던 “하나는 분화될 수 없다.” 주장을 파기하고, 존재는 수많은 개체로 분화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로써 원자들은 비어있는 공간, 다시 말해 무한대의 텅 비어있는 공간 사이에서 서성거리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데모크리토스 그리고 그의 스승인 레우키포스의 원자에 관한 학설은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운동의 모습이며, 실체의 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데모크리토스는 허황한 소문과는 무관한 세계 존재의 내재성을 하나의 원자 이론으로 진솔하게 표현하였다. 변모 자체는 자취를 감추고 있으며, 헤라클레이토스의 “위로 향하는 길, 아래로 향하는 길” 그리고 엠페도클레스가 내세운 바 있는 조직적인 결합 순서라든가 단계 순서는 여기서 삭제되어 있다. 다시 말해 사건은 아무런 질적 변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내부에서 그리고 겉 부분에서 작용하는 휴지(休止)와 같다. 그렇지만 어떤 다른 정지 상태가 어떤 작용의 규칙을 세우고 있다. 이러한 정지 상태는 나중에 인식할 수 없는 무엇으로 세속화된 개념 “아난케Ἀνάγκη” 내지는 “신적 존재Numen”로서의 숙명적 존재를 가리킨다. 이로써 숙명적 존재는 운동성을 견지하게 되는데, 이는 우리를 몹시 당황스럽게 만드는 내용이다.

 

운동은 헤라클레이토스의 경우 여러 사건의 리듬 속에 진행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사건은 가령 운명의 여신 하이마르메네, 행운의 여신 디케, 관습 그리고 법적 질서 등의 행위를 가리킨다. 그런데 오래전에 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은 천체의 움직임을 하나의 조화로운 유희라고 규정하였다. 그렇지만 데모크리토스는 원자들에게서 운동의 특성이 나타나듯이, 기계적 필연성 자체로서의 숙명적 존재 속에도 공히 어떤 운동성이 도사리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숙명적 존재는 헤라클레이토스에 의하면 이제는 세계를 벗어난 상부에서 더 이상 둥둥 떠다니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원자들의 밀침과 당김을 주도적으로 관장하고 있다. 이로써 세상의 사건은 원인 그리고 결과라는 결코 파괴할 수 없는 연속에서 출현한다.

 

숙명적 존재는 “청동과 같은ehern”이라는 고대의 첨가어와 함께 법칙의 정지 상태를 가리키지만, 오로지 자신의 내적 영역, 다시 말해서 내재적으로 모든 것을 관장하고 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수학이라는 자연과학을 통해서) “자연의 책”을 피타고라스의 방식으로 독해할 가능성을 떠올리게 된다. 그밖에 기계적 물질 이론이 내세우는 다음과 같은 숙명론 역시 여기서 드러날 수 있다. 예컨대 인간은 전체성 속의 영원한 정지 상태를 인위적으로 거역할 수 없다는 사고라든가, 숙명론적 존재가 영원히 원을 그리면서 우주를 형성시킨다는 사고를 생각해 보라.

 

그러나 운동의 법칙은 교환의 원리와 같다. 그것은 마치 변화 그리고 정지라는 역할이 서로 뒤바뀌는 법칙이다. 이로써 운동은 정지 상태보다도 더 높은 위치를 점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머리에 왕관을 씌우게 된다. 데모크리토스의 냉정함은 어떤 공화주의의 이념과 접목되어 있는데, 사람들이 제우스 신을 신봉하던 시기에 사물을 관장하는 휴지의 신으로부터 이러한 왕권을 빼앗을 수 있었다. 이오나아 출신의 철학자, 아낙사고라스는 만물을 구성하는 정신이자 운동의 원리로서 “누스 νοῦς”를 과감하게 도입하였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엘레아 학파의 경직성을 대변하는 “유황 θείον”은 자신과는 정 반대의 존재로 교체되고 있다. 그렇지만 원구의 신은 수많은, 수없이 다양한 “사물의 씨앗 απέρματα,“ 내지는 “사물의 종 χρωματα”으로 이전된다. 물론 헤라클레이토스 역시 제우스신을 불과 유사한 존재로 파악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제우스는 운동성을 지니지 않은 휴지(休止)의 신으로 규정하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번개의 신 제우스를 생각할 때 헤라클레이토스는 변증법의 번득거리는 법칙을 떠올린 셈이다.

 

아낙사고라스는 운동 자체로부터 운동의 정신을 찾아내었다. 누스는 말하자면 에너지의 소재를 가리킨다. 그것은 조화로움을 창조하고, 똑같이 아름다우며, 목적에 합당한 것으로 규정되는 무엇이다. 누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른바 호흡이라는 태고의 근원적 소재와 놀라운 관계를 맺는다. 여기서 말하는 공기는 “이성적인 공기”에 해당하는 것인데, 모든 것에 생기를 불어넣는 “영 (霊, πνεῦμα)”과 같다. 이러한 관련성은 아낙시메네스의 어느 제자인 자연 연구가, 아폴로니아 출신의 디오게네스에 의해서 중개된 바 있다. “생명의 호흡”은 조직체, 다시 말해서 생명의 움직임으로 이해되는데, 천체의 아름다운 질서는 조직체들의 “합목적성” 주위에서 자신의 개체를 확장한다고 한다. 그런데 생명의 근원인 “영”은 처음으로 “유황 θείον”으로 파고 들어간다. 어느 생물학자는 “영pneuma” 내지는 “영성spiritus”이라는 개념이 나중에 성서에 도입되고 있는 “정신ruach”과 같은 뉘앙스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움직임은 이런 식으로 어디서나 존재하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으로 이해되고 있다. 세상의 만물은 운동을 중단한 채 가만히 존재하지만, 급격한 생명의 물줄기라든가, 격렬하게 지나치는 폭품을 만나게 되면, 부글부글 끓어오르다가 다시 가라앉는다고 한다. 공간은 아낙사고라스에 의하면 생명의 호흡으로 밀집된 상태를 위해서 비어있다. 그곳에는 개별적 존재, 여러 가지 우회로, 특별한 존재뿐 아니라, 보편성으로서의 존재 그리고 유연하게 집결한 체제 내지는 틀 등으로 가득 차게 된다. 이어지는 장에서 우리는 존재의 개념적 방향에 관한 사항들을 일차적으로 기억해내려고 한다. 뒤이어 그것들이 감각적 개별성 그리고 사고의 보편성 사이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개별성으로부터 보편성으로, 혹은 보편성으로부터 개별성으로 향하는지를 추적하게 될 것이다. 이로써 밝혀지는 것은 다음의 사항일 것이다. 즉 감각적 개별성이라고 해서 무조건 사람들이 익히 생각한 바 있는 그러한 머리통이 아니며, 사변적 보편성이라고 해서 무조건 가급적이면 많은 사물을 담기 위해 만들어진 모자가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