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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설호: 중국 문명의 토대를 닦은 자들은 동이족이었다 (1)

필자 (匹子) 2022. 3. 29. 10:59

 

이들 가운데 누가 가장 멋있는가?

 

서양 사람들의 동양 문화에 관한 오류: 동양 문화에 관한 서양인들의 오류 내지 북동아 지역의 고대 문화에 대한 서양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의 편견 등은 참으로 심각합니다. 독일 철학자들은 라이프니츠 이래로 거의 대부분의 경우 동양의 문화가 중국의 사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착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고대 동북아 지역의 문화는 오직 중국의 황허 문명에 국한될 수는 없습니다. 아니, 그것은 엄밀히 따지면 중화주의의 사고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왜냐하면 고대의 동양 문화는 황하강 유역의 용산 문화가 아니라, 송화강 유역의 홍산 문화에 의해 그 토대가 다져졌기 때문입니다.

 

홍산 문화는 고조선 이전의 시대와 고조선 시대의 한민족의 문화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는 20세기 후반에 고고학적 발굴로 확인된 사실입니다. 동양의 고대 사상은 중국인들이 아니라, 한, 맥 그리고 예라는 세 걔의 부족에 의해서 완성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따라서 고대 동북아의 문명을 중국의 황허 문명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오늘날의 거대 중국의 중화주의라는 관점에서 조작된 역사 왜곡에 해당합니다.

 

문명은 기원전 500년의 차축시대 이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카를 야스퍼스는 『역사의 근원과 목표에 관하여Vom Ursprung und Ziel der Geschichte』 (1949)에서 다음과 같이 단언하였습니다. 세계사는 야스퍼스에 의하면 서양, 인도 그리고 중국이라는 3대 축으로 분할되는데, 기원전 500년 전후의 차축시대에 이르러 동서양의 모든 사상적 체계가 확립되었다고 합니다. (Jaspers: 40). 다시 말해서 차축시대에 이르러 그리스에서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중국에서는 노자, 공자, 묵자 등이 그들의 고유한 사상 체계를 완성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사실이 아닙니다.

 

1940년대 말에는 고고학적 발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야스퍼스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항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그 하나는 만주 지역에 해당하는 송화강 유역에 자리한 홍산 문화가 고대 중국의 황허 강 유역의 문화보다 천 여 년 이상 앞선다는 놀라운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바빌로니아 지역에는 이집트 문명보다도 더 오래된 수메르 문명이 만개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원전 3000년 이후로 동북아 지역의 거대 영역을 장악했던 나라는 고조선이며, 이곳의 문화가 인접한 고대 중국의 초라한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한국 문화가 중국 문화의 아류라고 주장하는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 A Study of History』는 수정을 요합니다.

 

동이족의 특성: 특히 고대의 동북아에서 홍산 문화를 주도한 자들은 동이 (東夷) 사람들이었습니다. 동이족은 기원전 3세기에 출현했다고 하는 『예기』의 왕제 (王制) 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동이: 이는 어질어서 만물을 살리기 좋아한다. 서융: 융은 흉해서 사람과 생물을 죽임에 공정하지 못하다. 남만: 만은 교만해서 임금과 신하가 같은 냇물에서 목욕하고 서로를 업신여긴다. 북적: 적은 편벽해서 부자와 수숙이 한 굴에서 살고, 그 행실이 도리에서 어긋난다.” (礼記, 十二, 王制).

 

동이 (東夷)는 자구적으로 “동쪽의 오랑캐”라고 해석되지만, 다른 관점에서는 “활을 잘 쏘는, 순박하고 어진 동쪽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물론 동이족 가운데에는 흉노, 동호, 오한, 선비, 거란, 몽골, 숙신, 읍루, 말갈, 여진 그리고 만주족이 있습니다. 이들은 같은 민족이며, 중국의 민족과는 현격하게 구분됩니다. (김종서: 81).

 

이를 고려할 때 동이계의 상당부분은 한민족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중국의 지리서 『산해경 (山海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군자의 나라에서는 옷과 모자를 쓰고, 칼을 차고 있었으나 서로 싸우지 않는다.” 여기서 동이계의 한민족은 유순하고 소박한 인성을 지닌 자라는 사실이 문헌으로 증명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가장 훌륭한 인간형으로서 동이계의 순 왕이 모범이 되었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단군 이래로 동북아에서 정치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친 나라가 고조선이라는 사실입니다. 가령 산동 반도에 고조선의 분국이 존재했다는 것만으로도 고조선이 얼마나 광대했는가? 하는 것을 증명해줍니다. (신용하: 58).

 

만주의 홍산 문화가 중국에 끼친 네 가지 범례 (1): 동북아 지역의 홍산 문화는 고조선 이전 그리고 고조선 시대의 문화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홍산 문화가 중국에 끼친 범례는 다섯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로 기원전 2000 여년 경에는 고조선이 중국 지역에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가령 단군 2세 부루는 기원전 2240년에 임금이 되었는데, 가장 현명한 성군으로 알려져 있고, 중국의 우왕이 부루에게 찾아와서 물 다스리는 법을 배워갔는데, 이로써 황하를 장악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김상일 A: 309). 이 점을 고려할 때 중국의 삼황오제에 관한 이야기가 한국의 삼신오제설을 모방한 신화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최고신 반고는 환국 (桓国)의 말에 삼위산의 납목 동굴에 이르러 임금이 된 신시의 군주 제견반고가한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 것입니다. (박제상: 293).

 

둘째로 고대 중국 “하”나라가 건설되기 전에 활동했던 왕, 순 (舜)은 동이족 사람이었습니다. 부도지에 의하면 도읍을 요에게 빼앗긴 단군은 돈예 (豚芮)를 정벌하고, 그곳에 유호씨를 보내서 요를 깨우치게 했습니다. 요는 유호씨의 아들 순, 다시 말해 제준 (帝俊)에게 두 딸을 아내로 바치면서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순은 자신의 권력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선정을 베푼 임금으로서 공자의 사표 (師表)로 각인되었습니다.

 

셋째로 신석기 시대에 53525 개의 중국 글자를 만들어낸 태호 복희는 중국의 전설적 황제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는 동이족 사람이었습니다. 태호 복희가 자란 곳은 기주 (冀州)인데, 이곳은 옛 동이의 땅이었습니다. 그가 채택한 한자의 발음부호인 반음절들은 우리말의 기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태호 복희는 한문자의 원형이 되는 팔괘 (八卦)를 그렸고, 각목으로 한문자인 서계 (書契)를 만들었습니다. (유승국: 23). 동양 철학의 정수라고 알려져 있는 역 (易)을 만들어내고, 음양 상대성과 태극 화합론을 찾아낸 사람은 중국인이 아니라, 동이계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넷째로 유교는 중국에서 생겨나서 만주와 한반도로 전래되었다고 통상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인즉 유교 사상의 토대를 마련한 자들은 동이족입니다. 가령 공자는 스스로 동이족 출신이었지만 이를 감추면서, 동이족을 비방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오래 전에 만주 지역을 호령했던 나라를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명명한 바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夷)가 인 (仁)으로 통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유교는 공자 자신이 말했듯이 요와 순의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것입니다. 공자는 옛날의 가르침을 새로이 했음을 분명히 하고, 이를 온고지신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맹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공자의 도는 맥도인데, 맥은 북방에 있는 이적의 나라이름이다. (子之道 貉道也 註貉北方夷狄之国名也.)” (『孟子』 62권, 告者章句下 16장). 여기서 맥은 예와 함께 동이족의 다른 이름입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공자는 죽기 직전에 자신이 동이족 출신이라는 것을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다섯째로 도교 사상 역시 동이족의 생활 방식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도교 사상은 기원전 3세기에 출현하여 기원 후 400년 동안 만주와 중국 본토에 퍼져 나갔습니다. 소박함과 평화를 추구하는 생활방식은 노자의 도덕경 14장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도는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는 것이고, 그래서 이 (夷)라고 한다. (視之不見名日夷)” (Laotse: 60).

 

여기서도 동이족의 “이 (夷)”가 다시 한 번 언급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사항이 여기서도 문헌으로 증명된다는 사실입니다. 즉 기원전 3000년 이래로 고조선의 선교 (仙教)가 존재했는데, 나중에 기원 전 6세기 이후에 노자와 장자에게 강렬한 영향을 끼쳤으며, 이후의 시기에 다시 만주와 한반도로 역수입된 것입니다.